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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인문학 코멘터리 2
숀 호머 지음, 김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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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필요에 따라 '생략'과 '부연'을 적절히 적용하며 라캉 입문서에 필요한 기본을 잘 갖추고 있다.

'생략'은 초심자에게는 불필요한 라캉의 난해한 기호나 이론에서, '부연'은 라캉의 전반적 이해를 위해 문학, 영화나 페미니즘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라캉 관련 입문서가 꽤 많은데 비교적 읽을만한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된 점도 높이 산다.

여기서 멈추기 아쉬운 일반적 독자라면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소개된 <라캉과 영화이론>로 넘어가거나, 지젝이 출연해 이데올로기와 욕망에 대해 풀어내는 두 편의 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도 독서의 흥미로운 연장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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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의 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법
강호진 지음 / 영림카디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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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이 소설을 다들 <다빈치코드>나 <장미의 이름>으로 읽어내고 있는데

표면적인 부분을 살피자면 물론 그렇게 읽어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독법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분상에서 경계나 사물을 이해하는 법 아니겠는가?

자신이 이해한 해석과 내용은 늘 자신의 인식수준을 대변하기도 한다.

나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교도 아니고, 추리도 아닌

스승찾기의 괴로움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는 스승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현인호에게는 스승이 없다. 

일단 현인호는 불교미술사 박사과정을 밟다가 지도교수와의

마찰(지도교수의 논문표절에 대한 폭로)로 인해 학교를 그만둔 상태다.

 

물론 홍제스님이라는 현인호가 존경해마지 않는 명백한 귀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3일간의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의 첫 날부터 홍제스님은 실종상태다.

그리고 소설내내 홍제스님은 오직 현인호의 회상속에서만 재현되는 신기루같은

존재다.

소설에서 현인호는 학문과 종교, 어디에도 제대로 된 스승을 가지지 못한

가련한 인물이다.

소설의 플롯은 바로 그 유일한 스승인 홍제스님이란 존재를

현인호가 추적하는 추리형식을 지니고 있다.

현인호가 영락사 주변암자를 돌아다니며 여러 승려들을 만나

 홍제스님의 행적을 탐문하는 것은 실은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구하러 다니는  순례와 다를바 없는

스승찾기의 일환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건을 풀게되는 결정적 계기는 스승들의 가르침이 아니다.

채집한 정보들(문헌들과 기록들)과 그의 이성이 추적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현인호가 지식과 논리적 추리를 통해 다다른 결론은

바로 홍제스님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을 통해 얻은 것이 고작 '이 시대의 스승은 죽었어!'라는 불행한 사실이라니.

어찌보면 작가의 정신적 성숙과 현실 인식의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소설의 여전히 읽을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이성이 추구해서 얻어낸 불행한 자리에서 소설이 멈추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소설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벙어리 아이가

극적인 순간마다 등장했다 사라진다.

소설의 플롯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 아이가 왜 자꾸 등장해야하는지

나는 읽으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 읽고 생각해보니 작가는 그 아이를 통해 스스로  

애써 도달한 논리적, 이성적 귀결에 흠집을 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스승없는 냉혹한 이성과 지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작가의 모습이 그 아이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이 지난 지금 작가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성숙이 어디까지 익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이후 소설대신 불교인문서들을 펴내고 있어 확인하기 어렵다.

그의  다른 소설을 기대해본다.) 

.

형식이 추리소설이라고 추리소설의 문법 안에서만 이해하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숨은 내용과 맥락을 파악해서

자신만의 사실과 삶으로 건져올리는 탐정이 되어야 한다.

그게 어쩌면 표면적으로 추리를 표방하는 이 소설이 은근히 담고 있는

진짜 의미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일반적 해석에 대해 덧붙이고자 한다.
이 소설을 평론가나 사람들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에 비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다소 미흡한 해석이다.

<장미의 이름>은 아드소 수사와 윌리엄 수사란 제자와 스승의 짝으로

형성되어있고, <다빈치코드>는 스승따윈 필요없는 이성적 정합에

골몰하는 글이다. 이 소설은 스승찾기의 맥락으로 보자면 결이 다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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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이란 무엇인가 - 현대 해석학의 경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해석학 입문
리차드 E.팔머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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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을 잘 씹어서 친절하게 전달해주는 저자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그래서 꽤 많이 팔리는 한국 학자의 난삽한 해석학 입문서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이 책이 번역서임에도 더 잘 읽힌다.

 

번역자인 이한우는 조선일보 기자이자 대학원에서 해석학을 전공한 이인데,

기자란 직업과 전공 덕분에 꽤 훌륭한 번역을 해놓았다.

그의 부담스런 정치색과 무관하게 이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다만 10여년 전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가 만들어 낸

최창집 파동을 보면서 수구이데올로기가 멀쩡한

학자적 능력을 얼마나 파괴시키는지 확인한 적이 있다.)

 

한국의 인문학이 사는 길은  명징한 문장을 제대로 전달하는 능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된 문장과 읽히는 문장은 단순한 글쓰기 능력은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능력이자 학문적 능력이다.

외국박사 학위를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거나

(실력을 확인해보면 허당인 경우가 많다)

외국서적을 짜깁기해서 논문을 써내고 학자연하는 학계의 풍토 속에서

폭넓은 인문적 소양과 철학, 그리고 사유에서 비롯한 글쓰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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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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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고, 원하는 내용에 대해 고만고만한 정보와 식견을 가지고 있어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즐거움'이다.  

이런 걸 '동감'이나 '동류'라는 묶음 속에서 출발하는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그건 끝이 있다.  서로가 너무 유사하기에 결국 뻔해지고 심심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큰 것을 만나면 우리는 즐거움 대신 '감동'을 받는다. 

'감동'은 세상에 유통되는 일반적인 식견과 상상력을 넘어설 때 온다. 

'감동'은 또한 내가 확장되고,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이다.   

 나는 이 '감동'이 흔히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것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건 문학이건 미술이건 대자연이건 말이다.... 

그런 면에서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클래식이란 말 밖에 따로 부를 말이  

없다.  

 

그런데 혹시 높고 험한 산을 올라가 보았는가? 

종주를 하거나 정산 부근에서 보는 자연의 신비에 '감동'을 받으려면 

'다리품'이란 게 필요하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말이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은 글의 도입부를  

일부러 어렵게 쓴다고 말했다. 작품을 높은 산에 비유하며 

그곳을 올라올 채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 즉, 다리품을 팔거나  

작가의 의중이나 템포를 따라올 끈기가 없는 이들에게까지  

등정의 감동을 쉽사리 허용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만약 <<죄와 벌>>의 300페이지 가량을 감동을 위한 다리품이라고 생각하고 견뎌낸다면  

그 이후부터 보이는 것들은 매순간 황홀하고 벅찬 희열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긴 한숨과 함께 한 방울의 눈물을 

떨구고야 마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책스럽더라도 부디 그러길 빈다... 

 

 덧붙이며 

출판사 열린책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이 책과 관련한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에 관한  

장삿속에 화가 좀 난다. 이번에 나온 건 양장본으로 

9800원 상 하로 나왔다. 그 전에 같은 도안으로 페이퍼백으로 7800원에 

나온 것(훌륭했다)을 어느새 가격은 유지한 채 판형을 미세하게 줄이고,  

작가소개가 달린 책 날개를 

잘라먹은 채로 구판의 기형처럼 내더니,  

이제는 양장본으로 산뜻하게 옷 갈아입히고  

값을 올렸다. 그래도 <<죄와 벌>>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상. 하 두권에서 가격이 오른 채 

상, 중. 하 세권으로 늘었다.  

요 근래 출판사들의 어려움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도 구판에서 찍은 쇄를  

대충 훑어보니 이렇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돈벌이가 꽤 짭짤했던 것으로 안다. 

그리고 작가에게 저작권료을 비싸게 준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싼 책 값 때문에 고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까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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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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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나 설명없는 소설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자면 이런 문장이 전혀 없는 소설 말이다.

 

"그녀는 창틀마다 먼지가 소복한 창가에 서서,

 자신이 병들 운명이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파괴되리란 불길한

 암시이라도 하듯 삐딱하게 기울어진 지구의 자전 축마냥

 애처로운 예각으로 그들이 있는 공간으로 잠입하는 

 늦은 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태어나 한 번도 안식의 밤을 보내지 못한 

 불면증 환자같은 얼굴을 한 그를 슬프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만든 예문은 아무리 봐도 오버투성이지만, 

 개인적으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짤막짤막 끊어치는 건조한 기사체의 단문보다는 

 다소 과잉같더라도 유려함을 뽐내는 복문과 장문을 선호하는 편이다.

 같은 신문쟁이 출신이지만 자신의 본업을 드러내는 헤밍웨이보다는

 다소 오버스런 김훈의 문장이 내겐 더 편안하다는 뜻이다.   

 문학적 글쓰기의 정수는 아직도 핵심을 찌르는 비유와 정교한 묘사라는

 고전적(구닥다리) 문예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내 입장에서

 이 소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소설의 거의 99퍼센트는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다못해. "그가 말했다"란 문장조차 생략된 채 말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잠시만 방심하고 읽다보면

 이 말을 누가 했는지 헷갈린다고 투정을 부리기 일쑤다.

 형식상 구조는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하는데

 사실 희곡과 시나리오 양 측 모두 대사 앞에 주인공의 이름을 쓰고

 대사를 집어넣는다는 점,

 괄호 안의 지문이 인물의 행동이나 표정, 시간 등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간결함을 따라올 수 없다.

 시각적으로 볼때, 이 소설은 한 인물의 대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큰따옴표만 생략해버린다면 그저 거대한 대화의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기도 하여라.

 인간의 두뇌는 그 건조한 텍스트 덩어리들을 적절하게 분리시켜서

 두 주인공 각각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를 입혀

 어느 드라마나 영화보다 생생하게 머릿 속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 넘치는 세상의 시각과 청각에 관련한 홍수 속에서

 그저 까맣고 햐안 것으로만 분리되는 문학의 텍스트가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예측이  

사라지고 마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밥(영상과 소리)보단

 내가 골라 먹는 식사(텍스트의 상상력)이 즐거운 법이니까.

 

 이렇게 말하다보니, 이 소설이 굉장히 현대의 영상물과는

 동떨어진 느낌으로, 혹은 정반대로 가는 듯 보이지만,

 결론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몰리나와 발렌틴이 나누는 거의 모든 대화는  

<캣피플> 같은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신기하고 재미있는 네 가지  

영화 이야기로 채워진다.

 



 



                              <캣피플> 1942년 작

 

 


 

<캣피플>1982년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으로 리메이크 .

 

 마치 독자들은 친구가 보고 온 영화를 자신에게 이야기해주는  

느낌을 받으며

 편안한 독서를 끌어갈 수 있는 장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누엘 푸익은 이미 소설가가 되기 전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소설과 영화를 연결시키는 것에 관심이 지대한 작가였다.

 그에 걸맞게 이 작품은 이미 영화로, 뮤지컬로, 연극으로 바뀌어  

전세계에서 공연된,

 혹은 아직도 공연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윌리암 허트가 몰리나 역을 맡은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



              국내에서 공연된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포스터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이 최종적으로 맡아야 하는 역할은 하나다.

 아주 멋진 시나리오를 받아든 감독이 되는 것이다.

 묘사와 비유가 없는 텍스트 사이에 당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집어넣고

 각각의 대사를 행할 배우들을 어떻게 연기지도 할지 상상하면서

 당신만의 영화를 머릿속에서 완성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어느 대작이나 흥행작보다  

당신을 더 전율케 할 것이다.

 

 추가로 권하고 싶은 것 한 가지.

 이 소설을 읽으며 상상 속에서 당신만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다른 이들이 이미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도 감상해 볼 것.

 



 

 

 

 혹시 아는가? 저것밖에 못 만드냐고 탄식하면서 그 날부터 영화계와

 연극계로 투신할지...그리고 한국에서 거장이 나오게 될지.

 그렇게 되신 분은 내게 술 한잔 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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