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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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나 설명없는 소설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자면 이런 문장이 전혀 없는 소설 말이다.

 

"그녀는 창틀마다 먼지가 소복한 창가에 서서,

 자신이 병들 운명이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파괴되리란 불길한

 암시이라도 하듯 삐딱하게 기울어진 지구의 자전 축마냥

 애처로운 예각으로 그들이 있는 공간으로 잠입하는 

 늦은 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태어나 한 번도 안식의 밤을 보내지 못한 

 불면증 환자같은 얼굴을 한 그를 슬프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만든 예문은 아무리 봐도 오버투성이지만, 

 개인적으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짤막짤막 끊어치는 건조한 기사체의 단문보다는 

 다소 과잉같더라도 유려함을 뽐내는 복문과 장문을 선호하는 편이다.

 같은 신문쟁이 출신이지만 자신의 본업을 드러내는 헤밍웨이보다는

 다소 오버스런 김훈의 문장이 내겐 더 편안하다는 뜻이다.   

 문학적 글쓰기의 정수는 아직도 핵심을 찌르는 비유와 정교한 묘사라는

 고전적(구닥다리) 문예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내 입장에서

 이 소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소설의 거의 99퍼센트는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다못해. "그가 말했다"란 문장조차 생략된 채 말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잠시만 방심하고 읽다보면

 이 말을 누가 했는지 헷갈린다고 투정을 부리기 일쑤다.

 형식상 구조는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하는데

 사실 희곡과 시나리오 양 측 모두 대사 앞에 주인공의 이름을 쓰고

 대사를 집어넣는다는 점,

 괄호 안의 지문이 인물의 행동이나 표정, 시간 등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간결함을 따라올 수 없다.

 시각적으로 볼때, 이 소설은 한 인물의 대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큰따옴표만 생략해버린다면 그저 거대한 대화의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기도 하여라.

 인간의 두뇌는 그 건조한 텍스트 덩어리들을 적절하게 분리시켜서

 두 주인공 각각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를 입혀

 어느 드라마나 영화보다 생생하게 머릿 속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 넘치는 세상의 시각과 청각에 관련한 홍수 속에서

 그저 까맣고 햐안 것으로만 분리되는 문학의 텍스트가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예측이  

사라지고 마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밥(영상과 소리)보단

 내가 골라 먹는 식사(텍스트의 상상력)이 즐거운 법이니까.

 

 이렇게 말하다보니, 이 소설이 굉장히 현대의 영상물과는

 동떨어진 느낌으로, 혹은 정반대로 가는 듯 보이지만,

 결론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몰리나와 발렌틴이 나누는 거의 모든 대화는  

<캣피플> 같은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신기하고 재미있는 네 가지  

영화 이야기로 채워진다.

 



 



                              <캣피플> 1942년 작

 

 


 

<캣피플>1982년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으로 리메이크 .

 

 마치 독자들은 친구가 보고 온 영화를 자신에게 이야기해주는  

느낌을 받으며

 편안한 독서를 끌어갈 수 있는 장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누엘 푸익은 이미 소설가가 되기 전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소설과 영화를 연결시키는 것에 관심이 지대한 작가였다.

 그에 걸맞게 이 작품은 이미 영화로, 뮤지컬로, 연극으로 바뀌어  

전세계에서 공연된,

 혹은 아직도 공연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윌리암 허트가 몰리나 역을 맡은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



              국내에서 공연된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포스터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이 최종적으로 맡아야 하는 역할은 하나다.

 아주 멋진 시나리오를 받아든 감독이 되는 것이다.

 묘사와 비유가 없는 텍스트 사이에 당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집어넣고

 각각의 대사를 행할 배우들을 어떻게 연기지도 할지 상상하면서

 당신만의 영화를 머릿속에서 완성해 내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어느 대작이나 흥행작보다  

당신을 더 전율케 할 것이다.

 

 추가로 권하고 싶은 것 한 가지.

 이 소설을 읽으며 상상 속에서 당신만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다른 이들이 이미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도 감상해 볼 것.

 



 

 

 

 혹시 아는가? 저것밖에 못 만드냐고 탄식하면서 그 날부터 영화계와

 연극계로 투신할지...그리고 한국에서 거장이 나오게 될지.

 그렇게 되신 분은 내게 술 한잔 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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