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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스티븐 L. 펙 지음, 김항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평점 :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스티븐 L. 펙의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은 단 168쪽의 짧은 분량이라 몇 시간이면 단숨에 읽히지만...
책장을 덮은 뒤 밀려오는 그 아득함과 서늘함은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작품이에요.
주인공 쇠렌 키르케고르(우리가 아는 철학자와 이름이 같은 평범한 남성)는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인물이에요.
하지만 사후 세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의 구원이 아닌, 영원해 보이는 도서관 형태의 지옥이었죠.
이곳 지옥은 불타는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곳이 아니에요.
매일 깨끗하게 정리되는 침실, 키오스크로 주문하면 무엇이든 나오는 음식, 죽어도 다음 날이면 멀쩡히 다시 살아나는 육체...
심지어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명확한 조건까지 제시돼요.
알파벳과 문장 부호가 무작위로 배열된 끝없는 서가 속에서, ‘내 인생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전하게 기록된 책 단 한 권’을 찾아 반납 슬롯에 넣기만 하면 지옥에서 해방된다는 것이죠.
확률이 0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주인공과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책을 찾아 헤매기 시작해요.
하지만 무한에 가까운 조합 속에서 책을 찾는 일은 수백 년, 수만 년, 수억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으로 이어지는데...
죽지 않는 육체 속에서 과연 그 희망은 구원이었을까요, 아니면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을까요?
저자인 스티븐 L. 펙은 실제 진화생물학자예요.
과거 베트남 생태 조사 중 희귀 세균 감염으로 열흘간 환각을 겪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고, 그 경험이 이 소설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무한의 세계와 인간 정신이 천천히 무너지는 과정이 기이할 정도로 실감 난답니다.
이 소설이 진짜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이유는 ‘희망을 남겨두었다’는 점이에요.
만약 아무런 출구가 없는 완전한 절망이었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적응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딘가에 내 책이 존재한다’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 인간을 영원히 멈출 수 없게 만들죠.
피나 몬스터가 등장하는 자극적인 공포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간’과 ‘무한이라는 아득함’이 인간의 이성을 어떻게 파괴해 가는지 생생하게 보여줘요.
짧은 소설이지만 책을 덮고 나면 내가 서 있는 현실의 바닥조차 살짝 흔들리는 듯한 서늘한 몰입감을 선물해 준답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해요.
✔ 어설픈 스릴러에 질린 독자
피나 귀신이 나오는 뻔한 공포 대신, 사유할수록 깊어지는 철학적·심리적 공포를 느껴보고 싶은 분
✔ 단숨에 몰입할 짧은 책을 찾는 분
168쪽의 부담 없는 분량으로, 주말 밤이나 저녁에 집중해서 완독하기 딱 좋은 책
✔ 카프카, 보르헤스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
『바벨의 도서관』처럼 무한과 인간 존재에 대해 기발하고 서늘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선호하시는 분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서, 출구가 있는 희망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오랫동안 잠 못 이루게 만들 단 하나의 독특한 걸작,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서늘한 상상의 세계로 떠나보고 싶은 분들께 강력히 추천해요.
😍 아카 님의 서평모집을 통해 자음과모음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