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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평점 :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음도 잃고 사랑도 잃은 반백살의 동성애자 레스(less)다. 이름마저도 뭔가 부족해 보이는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방금 출판사로부터 작품 하나를 거절당한 참이다. 거기다 떠나간 옛 애인의 결혼식 청첩장까지 받고나니 이 난감한 현실에서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다. 절대 응할 생각이 없던 출판사, 학계, 지인으로부터의 모든 초대를 받아 드리자 뉴욕, 멕시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모로코, 인도, 일본까지 아우르는 세계문학기행 지도가 완성된다. 우리의 레스는 어떤 여행을 하고 돌아오게 될 것인가? 돌아와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
p.45 신사 레스, 작가 레스, 힙스터 레스, 식민주의자 레스. 진짜 레스는 어디에 있을까? 사랑을 두려워하는 청년 레스는? 25년전의 완전 진지한 레스는? 글쎄, 그 사람은 하나도 챙겨오지 않았다. 그 모든 세월이 지난 지금 레스는 그 사람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위트, 유머와 풍자가 난무한다. 시공간이 한줄 상관으로 뒤바뀐다. 이 정신없는 여행에서 레스라는 인물을 따라가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초반에는 이 소설의 형식이 전혀 짐작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지만 읽어갈수록 어떤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적응이 된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타이틀이 되려 이 책을 더욱 블랙 코미디스럽게 완성시켰다는 느낌도 든다.
p.89 “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게 스물다섯 살짜리가 주식시장 얘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아님 세금이나. 아님 빌어먹을, 부동산이나! 마흔 살이 되면 그것밖에 할 얘기가 없거든. 부동산이라니! 재금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스물다섯 살짜리는 누구든지 끌어내서 총살해야 한다니까. 사랑과 음악과 시에 대해서 얘기해. 한때 중요하게 생각하게 생각했다는 걸 모두가 잊어버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매일을 낭비하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여행지마다 회상되는 레스의 과거는 온통 젊음의 황금빛 아우라가 넘치는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쉰살을 앞둔 지금은 껍질이 없는 사람, 바보 사랑꾼, 피터팬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선천적인 순진무구함 때문이라면 지금 닥친 현실의 가혹함은 견뎌야 할 시련일까. 여러 나라에서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레스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고 그리워 하지만 결국 본인이 얼마나 희극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남은 시간이 얼마나 광활한지 깨우치는 계기도 된다. 자신의 인생에서 로버트, 프레디 같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p.275 “아서, 난 생각을 바꿨어. 너한테는 희극인의 행운이 있어.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는 불운이 따를지언정, 중요한 문제에서는 운이 좋은 거지. 내 생각엔 –아마 넌 동의하지 않겠지만- 네 인생 자체가 희극인 것 같아. 전반부만이 아니라 전체가.
너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이야. 너는 모든 순간을 갈팡질팡 넘어가며 바보가 됐어. 오해하고 말실수를 하고 우연히 마주치는 그야말로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 걸려 넘어지고도 네가 이겼어. 넌 그걸 깨닫지도 못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는데, 하나는 사랑의 결말이 꼭 결혼이어야 할까? 또 하나는 나이가 든다는 건 불행한 일일까? 이다. 동성애에 대해서 그다지 너그럽지 못한 나조차도 책이 전개 될수록 레스가 하는 사랑이 매우 보편적인 로맨스로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다 같은 동성애자 클라크의 연애의 결말을 보며 ‘사랑의 결말이 꼭 결혼일 필요는 없지’라며 주억거리고 있다. 레스는 극 중 내내 젊음이 시든 스스로를 형편없이 여긴다. 그런 레스에게 내 경험에 한정된 얘기지만 늙어가는게 영 재미없는 일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가장 젊은 하루가 아닌가라고… 물론, 그의 옛 연인 로버트가 이미 다 해준 말이기도 하다.
혼몽한 봄바람 속에 조금 부족한 게이 친구와 정신없이 뒤죽박죽인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