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성육신적 교회 - 탈육신 시대에 교회의 역사성과 공공성 회복하기
마이클 프로스트 지음, 최형근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육신적 교회가 왜 그대에게 필요한가?


  요즘 밖으로 나가 세상을 둘러보면 한결 같이 스마트 폰에 빠져 들어갈 듯 눈을 붙이고 몰입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 할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문명의 발달이 주는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원초적인 요소에 매몰 되어 버렸다. 단적인 예로 SNS안에서 이용자들의 모습들을 유심히 관찰을 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포장하기에 애를 쓰는지를 분명하게 알수 있다. 자신이 현실에서 극복하지 못했던 다양한 관계의 문제들을 SNS안에서 쉽고 편리하게 해소시키는 탈출구로 매번 배설하여 자신의 자아를 내가 꿈꾸는 자아 안으로 함몰 시켜 버린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결론적으로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Narcissism)등으로 인간의 관계를 단순히 각자가 필요 할 때 쉽게 꺼내 쓸수 있는 휴대용 가치로 전락 시켜 버렸다. 이것은 고스란히 신앙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신자들에게 이원론적인 사상을 자기 스스로가 강요해 버리는 결과가 초래 되었다. 단절이 단절을 만들고 그 단절은 결론적으로 포류하고 있는 인간의 자아상을 계속적으로 조명하는데 이것을 ‘성육신적 교회’의 저자인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의 방식들을 살기를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성육신’과는 반대의 개념으로 정의되는 ‘탈육신’으로 신자의 고유의 삶이 이탈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대표적으로 비디오 게임과 포르노 중독에 젖어 있는 젊은이들을 이야기 하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극복해야 할 많은 관계들을 해결해야 하는 용기조차 빼앗아 버렸으며 지속적으로 고립된 관계 속에서 황폐해져가는 삶을 유리하듯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한다(p42). 불행하게도 이러한 현상들은 가족 관계에서도 자주 찾아 볼수 있다. 가족들이 도란 도란 식탁에 앉아서 서로의 삶을 인격적으로 다듬어 줄수 있는 시간들을 스마트 폰이라는 문명의 발전이 강탈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가족 공동체의 재앙과도 같아서 사회 공동체에 진입하고 나서도 고스란히 그 문제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스스로에게 집착하여 이기주의라는 괴물을 탄생시켜 버린 이 세상이 바로 ‘탈육신’된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가족이라는 최초의 공동체가 탈육신적인 삶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더욱 더 침체 된 가족 관계와 사회 풍토가 성육신적 교회의 모습을 점차 빼앗아 버릴 것임을 너무나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어 성육신적 교회의 모습에 대한 어떤 정의가 필요 할까? 프로스트는 탈육신 되어가는 세상과 교회에 대항하여 성육신의 단어에 대하여 세가지로 정의하며 이에 따라 대안을 분석한다. 

1) 성육신의 본을 따르는 것 2) 성육신의 지속적인 힘으로 능력을 부여 받는 것과 3) 하나님의 성육신적 선교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분류 혹은 분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인간이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총체적인 삶을 성육신적 삶이라 정의한다면 칼빈이 말했던 신적 의상을 소멸해 버린 인간이 과연 성육신적 삶을 당당하게 전할수 있는 것일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의 말은 예수가 전하신 성육신적인 삶을 따르는 모든 믿는 신자에게 해당하며 그것을 통해 호흡하며 그 규칙들을 모방하여 서로가 서로를 본 받는 삶의 체계가 형성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 벧전 1:16)의 말씀은 곧 거룩 할수 없는 인간이 거룩한 자로써 말할수 있는 주님께서 주신 자신감으로써 삶을 영위 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살아 숨쉬어 역동적으로 신자들을 성육신적 삶으로 구속 시키며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함을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거룩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탈육신적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육신적 교회를 위협하고 있음을 예의 주시하며 이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선교를 할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책을 풀어 낸다. 먼저 9장에서 그는 현재 발전해 온 단기선교가 선교의 단어가 제거 된 “자원봉사관광”(voluntourism)의 부상을 목격했다고 말한다(p220). 과연 보육원 방문이나 클릭티비즘이 만약 우리가 하는 주 사역이라면 과연 성육신적 교회를 형성 할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 된다. 여기서 그는 로버트 립턴의 ”긍휼사역 선서“(Oath for Compassionate Service)를 인용 하여 주로 가난한 선교 지역의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자생할수 있는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목적으로 돕는 손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립턴은 실제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시도는 선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을 양성하는 좋은 계기가 될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어느 정도 입장이 다르다. 선교의 목적을 ”구제를 해야 한다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다 보니 선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희미 해질수 있는 위험성 또한 보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구제를 먼저 하지 않고 복음을 먼저 전하는 메신저로써 선교를 감당한 것처럼 선교의 주체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이 부분이 공급 되어지지 않으면 행위로 점철 되어 지는 탈육신적 선교로 변질 되어 버릴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선교의 주체는 행위가 아닌 복음으로써의 방향성을 절대적으로 유지 한 채 고민을 쌓아 가야 한다. 


  물론 책의 주제가 이 시대를 겨냥하고 있고 “탈육신”에서 “성육신”으로 지형이동을 하는 실제적인 과정을 다루고 있으므로 글이 다소 편향 되어 질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일 때 구제 만큼 그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이끄는데 편리한 수단은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리고 바울 또한 고린도 후서 9장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연보(헌금)함으로 하나님께 감사(고후 9:11~12)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들이 복음 앞에 진실 됨으로 복종하기를 권고 한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유하고 채워 주려는 시도는 마땅히 복음과도 부합한다. 이것을 마이클 프로스트는 성육신적 교회에 대비해서 지속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이 책에 역력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성육신적 교회의 포지션을 취하는데에 있어서 인간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결코 독립 할수 없음을 피력 하면서 만약 앞으로의 인류가 표면적 이미지와 시뮬레이션 및 파편화되고 단순화된 것에 익숙해진다면 분명히 의미 있는 성찰과, 평생의 약속이나 연대감을 포용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p278).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위에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게 중요하다. 예전에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던 시절에 옆에 붙어 사는 이웃들과 어떤 관계속에 지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매일 같이 마실 나온 것처럼 이웃들과의 교제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옆에 누가 살았는지가 죽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소통의 부제가 사랑의 부제로 연결 되어 삭막한 세상을 인간 스스로가 시뮬레이션의 세계에 자신을 고립 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이웃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디지털의 세계로 환원 되는 것이다. 디지털은 자본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본의 세계는 개인주의로 경쟁 사회를 부축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즉, 탈육신 되어 가는 이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육신의 원인을 분석하여 성육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정립 하는 것이 현대 선교의 최대의 난점이자 해답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난제들을 제시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에게 스스로가 해답을 찾을수 있도록 충실히 쓰여진 “책”임은 틀림 없다.


  현대 시대에는 누구도 믿을수 없다라고 많은 사람은 주장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성육신 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며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는 것이 이 책의 실제적인 교훈처럼 보인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격려로 글을 마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싸움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우리는 진리를 맛보았고,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없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갈 뿐이다. 우리는 최고라고 주장하면서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세상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는 자들로 중심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모습을 지속해서 드러내는 급진적 신앙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p378)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급진적으로 실천했던 성육신적 삶에 대하여 용기 있게 부딪혀 나가야 할 사명자 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탈육신의 사회는 계속해서 교회를 위협하지만 성육신적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진리를 수호하는 이들에게 포기 하지 않는 힘을 계속해서 공급해주신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자. 나도 그의 격려에 화답하여 말씀 구절로 마이클 프로스트에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싶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신학 지형도 - 조직신학 각 주제에 대한 현대적 개관
켈리 M. 케이픽.브루스 L. 맥코맥 엮음, 박찬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 신학은 철학의 손을 잡고 베타주의와 포괄주의 사이를 활발하게 운행한다. 배척과 포용이 존재 하며 때로는 서로를 보완하여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상들에 대한 적절한 비유와 함께 설득력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철학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이 준비 되어 있지 않는 이상, 현대 신학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에 신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 하여도 신학과 철학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관찰 할수 없는 도구가 없다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왔던 현대 신학을 다루는 서적들은 대부분 인물을 위주로 서술하거나 현대 신학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경향의 서적들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이번에 발간 된 『현대 신학 지형도』는 서론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의 15가지의 주제들을 신학적으로 통찰력 있게 그려 낸다. 이러한 분류는 신학 공부를 하는 독자로 하여금 안정감을 찾을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내가 누군가에게 현대 신학의 어떤 한 분야를 설명하고 싶을 때 챕터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읽고 대답 할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신학적인 교양을 키워 낸다.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교양이란 세상의 역사(문화적·정치적·사회적·윤리적)를 분석하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다시 담아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는 항상 “현대”를 대상으로 신학과 철학을 발전시켜 왔다.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현대가 현대를 재창조하는 현상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시대를 타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 되어 현대 신학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위치하게 되었다. 특히나 현대 신학의 입구와도 같은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이 서로를 대척점으로 삼고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을 구축했다. 이는 브루스 L. 맥코맥이 서론에 『현대성을 신학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서술했던 것처럼 슐라이어마허는 “고전적 유신론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고난당할 수 없음(또는 “영향 받을 수 없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의 완전한 단순성(simplicity 또는 “구성요소의 결여”)이라는 결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적인 측면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헤겔은 반대로 고전적 유신론을 유지하면서 신정론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여 슐라이어마허를 극복한 존재로 간주 되어 현대 신학을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부분은 현대 신학을 진입 하는데 큰 틀을 제공해 준다. 

그 이후로의 현대 신학은 두 인물을 기초로 하여 사상들을 전개해 나가는 경향을 볼수 있다. 프레드 센더스는 2장『삼위 일체』에 관해 다룰때에도 헤겔의 영향은 몰트만에게서도 찾을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몰트만은 헤겔의 가장 창조적이고 영향력 있는 옹호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밝힌다. 헤겔과 몰트만은 역사 안에서 자신들을 소통함을 통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역사 안으로 회귀시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용법으로 “역사적 삼위 일체론”을 주장하는 공통적인 면모를 관찰 할수 있다. 이처럼 각 장마다 현대 신학의 지대한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들을 나열함으로 어떻게 상호간의 체계들을 연결 시키는 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들을 통해서 신학적인 격차를 극복 할수 있도록 도와 준다. 

대다수가 개혁주의에 의존하고 있는 신학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장에서 맥코멕은 이렇게 밝힌다. “그것이 유형론적(typological)이든, 주제 중심적이든, 아니면 거의 역사학적이든 자신만의 접근방식을 택하도록 안내를 받았으며, 무엇을 포함시킬지 그리고 무엇을 합리적으로 배제할지에 대해 그들은 상당한 자유를 부여 받았다. 분별력 있는 독자는 몇몇 집필자들에게, 현대 신학자들이 다루는 문제들을―그것들이 이전의 일련의 고전적인 사고로 소급될 수 있음에도―현대 신학자들 자신의 고안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평준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그 대신 그 차이를 현대신학의 풍요로움을 증언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보았다” 

현대 신학은 시대를 거듭해 가면서 풍요로움과 함께 성경이 쉽사리 깨뜨릴수 없는 견고한 성으로 변모해 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도는 현대 신학을 공부 해야 할 일은 자명라고 판단 되어 진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다원주의등의 가속화함에 따라 성경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있으므로 현대의 신학을 성경으로 풀어 낼수 있는 이들이 공급 되어지지 않는 이상 현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방어 할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 지형도』는 각 분야의 신학자들이 전개해 놓은 현대의 신학의 흐름을 한 눈에 볼수 있으므로 목회자와 신학도가 앞으로 현대를 풀어 나가야 할 과제에 대해서 면밀히 볼수 있는 그러한 장점을 가진 책이다. 역사는 더욱 더 빠르게 업데이트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를 알지 못하고는 성경적인 변증이 불가하다. 그러므로 현대의 신학이 주는 풍성함속에 성경과 대치되는 부분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 할 때 이 책을 적극 추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