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가 약해집니다. 그리고 미국 금리도 낮아지죠. 달러 부채 부담이 줄어든 상황에서 신흥국의 달러 부채 부담을 줄여주는 지원책도 고려됩니다. 그리고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신흥국이 성장할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신흥국의 성장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지 않았을까요? - P309
신흥국에 좋은 상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고전하고 있던 국제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바닥을 찍고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하죠.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며 전 세계에서 원자재를 사들인 것이 원자재 가격 상승의 첫 번째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금리가 인하되면서 나타난 달러화의 약세가 원자재 가격 상승을 더욱 자극하게 되죠. - P309
당시 신흥국과 산유국들은 벌어들인 달러화를 안전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미국 국채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는 것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미국에 돈을 빌려주고 국가의 차용증, 즉 국채를 받는다는 겁니다. 미국 국채 투자가 크게 늘어났다는 건 비록 빌린 돈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달러화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내에 돈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연준의 금리 인하로 이미 돈이 많이 풀려 있습니다. 그리고 신흥국과 산유국의 미국 국채 투자로 인해 미국으로 자금이 밀려들었죠. 미국 내 자금 공급이 넘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돈이 어딘가를 향하게 되지 않을까요? 네, 그 자금들은 버블 붕괴를 겪으면서 초토화되어 있던 주식시장을 외면하고 각종 규제 완화 등으로 인해 조금씩 열기를 더해 가고 있던 미국 주택시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미국주택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죠. - P313
신흥국과 산유국은 상당한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달러를 미국에 빌려주고 국채를 받았습니다(미국 국채에 투자했습니다). 미국 내 달러 유동성이 넘치면서 이 돈이 미국 주택 시장을 향했고, 주택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미국 사람들의 소비가 늘어난 겁니다. - P314
그러면 미국의 소비가 늘어나니, 즉 시장에서 사는 사람이 늘어난 만큼 신흥국과 산유국들은 미국에 더욱 많은 수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달러를 더 많이 벌고, 그걸로 미국 국채에 투자를 하고, 미국에 다시 돈이 넘치고, 주택 가격이 오르고, 소비가 늘고, 산유국이 수출을 늘리고, 달러를 더 벌고, 미국 국채에 투자하고…………. 자, 물건을 만든 A가 B에게 물건을 팝니다. 돈이 없던 B는 더 이상 A의 물건을 살 수 없었지만, 다행히 A가 B에게서 받은 돈을 다시 A에게 빌려주면서 계속 A의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죠. - P315
미국의 무역 적자가 늘고,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달러를 빌려오면서 재정 적자도 늘어납니다. 국채를 많이 발행한 만큼 그 국채 보유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이자 비용도 크게 늘어나겠죠? 그 이자 역시 국가가 지불해야 하니 미국의 재정 적자는 더욱더 크게 늘어날 겁니다. 신흥국과 산유국의 흑자가 계속해서 쌓이는 만큼, 미국의 재정및 무역 적자 역시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게 됩니다. - P315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해 많은 분들은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곤 합니다. 혹은 조금 디테일하게 미국 주택 가격 하락으로 인해 파생상품의 부실이 현실화되었고, 금융기관들의 파산 우려가 커지며 나타난 신용 경색이 금융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도 하십니다. 이는 미국 금융기관의 부실은 설명할 수 있어도 당시 글로벌 경제 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하던 신흥국과 이들 국가들을 둘러싼 ‘글로벌 불균형‘이라는 환경을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줄어든 소비를 메워줄 수 있는 신흥국의 성장은 글로벌 불균형 문제를 일정 수준 해결하면서 이후 금융위기 극복의 핵심이 되죠. - P352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소비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였던 미국이지만 양적완화 및 은행 구제 등의 과감한 정책 도입으로 미국 내 소비 위축의 충격을 최소화했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은 과감한 부양책을 통해 소비를 확대해 나가게 됩니다. 미국의 소비 위축은 예상보다 적은데, 신흥국의 소비 확대가 예상보다 강했다면 전 세계 소비는 탄탄하게 유지되지 않았을까요? 네, 2009년 하반기부터 글로벌 경제는 빠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금융위기의 파고에서 벗어난 것이죠. - P376
금융위기 이후 경기 부양의 한 축이었던 중국은 2010년 초부터 긴축으로 빠르게 전환했습니다. 다른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도비슷했는데요, 2009년 3월부터 시작된 제1차 양적완화는 예정대로 2010년 4월에 종료되죠. 미국의 은행 시스템에 거대한 자금을 밀어넣어주는 양적완화가 2010년 3~4월에 걸쳐 마무리된 겁니다. 앞의 중국 케이스와 합치게 되면 중국과 미국이 2010년 상반기 동시에 경기 부양에서 어느 정도 손을 떼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기가 자체적으로 강해졌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중국과 미국의 쌍끌이 경기 부양, 이른바 돈 풀기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상황이라면 어땠을까요? 돈 풀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취약한 곳부터, 가장 어렵게 버티고 있던 곳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겠죠.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그리스입니다. 유로존 국가 중에서도 정부 부채가 가장 큰 편에 속했는데, 금융위기 이후 성장이 무너진 상황에서 추가적인 양적완화 등의 돈 풀기가 사라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 돈이 마르자 가장 먼저 흔들렸습니다. - P414
유럽 재정위기 이후로도 이런 저성장·저물가 기조가 이어졌죠. 상당한 경기 부양을 단행하면 그 당시에는 효과가 있지만 해당 부양책을 거두어들였을 때에는 다시 성장과 물가가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반복했습니다. 너무나 연약해지고 쉽게 올라오지 않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파수꾼이라고 불리우던 연준도 ‘인플레이션‘보다는 장기적인 성장 충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일본식 ‘디플레이션‘으로 초점을 옮기기 시작했죠. 그리고 구조적 장기 침체 우려가 커져가던 2016년 10월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옐런은 고압경제(High Pressure Economy)를 주장하게 됩니다. - P422
고압경제는 수요가 공급을 웃도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고, 사람들의 채용을 늘리게 되면서 일손을 구하기 어렵게 되는 아주 강한 고용시장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경기가 조금 좋아지고, 이로 인해 물가가 조금 올라오면 바로 경기 부양을 포기하는 기존의 정책에서 벗어나 과감한 경기 부양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인플레이션 오버 슈팅, 즉 목표치인 2퍼센트를 일정 기간 넘어서도 내버려 두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강조한 겁니다. 두 번째 문단에서는 그런 고압경제의 효과로 수요가 계속해서 늘어나게 되면 기업들은 투자를 확대하게 될 것이고, 이는 노동 시장을 더욱 뜨겁게 달굴 것이라고 말하고 있죠. 마지막 문단에서 옐런의장은 금융위기 이후 총수요와 기업들의 투자 능력이 모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합니다. 네, 이런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강한 부양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 P425
그래도 2020년 초 정도되니 미국의 실업률도 50년 내 최저 수준으로 내려오고, 미국 경제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찾아온 메가톤급 악재가 바로 코로나19였습니다. 연준은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올렸던 것들이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과감히 행하지 않는다면 일본처럼 잃어버린 30년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미국 연준과 정부는 지난 챕터에서 보셨던 것과 같은 강력한 경기 부양에 돌입했죠. 그리고 과도한 부양책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막 올라오기 시작했던 2021년 초, 연준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인플레이션의 상승이 두려우니 바로 제압하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여기서 섣불리 부양책을 내리면 다시 디플레이션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지금의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일 가능성이 높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 P426
40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이기에, 그리고 그 반대편인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워낙에 컸기에 미국 정부나 연준은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뒤늦게 금리 인상을 시작한 만큼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금리를 인상했죠. 2022년 3월 0~0.25퍼센트였던 기준금리는 2023년 3월 FOMC의 추가 금리 인상으로 4.75~5.0퍼센트로 인상되었습니다. 딱 1년 만에 4.75퍼센트의 기준금리 인상이 단행된 것이죠. 실제로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렸던 1980년대 초반 이후 가장 빠른 속도의 인상입니다. - P439
1970년대 후반 연준 의장으로 폴 볼커(Paul Volcker)가 취임합니다. 볼커는 역대 미국 연준 의장 중 가장 긴축적인 통화 정책을 운용한 인물이죠. 미국 중앙은행에서 시중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긴축을 선호하는 인물들을 매파(Hawk), 유동성을 풀어주는 정책을 선호하는 인물들을비둘기파(Dove)라고 부릅니다. 폴 볼커는 ‘매파 중의 매파‘로 인식되는데 그는 취임 일성으로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물가를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물경기를 박살 내는 겁니다. 표현이 조금 자극적이긴 한데요, 경기가 무너지게 되면 실물경제에서 수요가 사라지게 됩니다. 가격은 하늘에 떠 있는데 수요가 사라지게 되면 가격이 급격하게 추락하겠죠. 볼커는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볼커는 당시 미국 기준금리를 20퍼센트 수준까지 끌어올립니다. 미국 기준금리가 20퍼센트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금리는 이보다도 훨씬 높았겠죠. 당시 미국 중소기업의 40퍼센트가 파산하는 등 미국 경제는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게 됩니다. 미국 실업률도 급등했죠. - P455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제1차, 제2차 석유파동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석유파동 같은 것이 없으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고 볼 수 있죠. 1960년대 후반부터 방만한 재정 지출, 즉 경기부양과 맞물려 인플레이션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제압하지 못한 채 인플레이션이 수년간 이어지다 보니 인플레이션은 고질병이 되어버렸고, 그 고질병으로 수차례 문제가 재발했죠. 우리는 지금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하나의 고질병처럼 자리 잡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고질병이 되면 당장의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는 것도 힘들 뿐 아니라 이후에도 언제든 인플레이션이 재발할 수 있을 테니까요. - P457
결국 SVB의 파산원인을 되돌아보면 주요 고객층인 IT벤처 산업의 호황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과도한 낙관론, 은행 규제 완화와 같은 제도 변화로 인한 극단적 장단기 미스매칭, 그리고 수년간 볼 수 없었던 금리의 급격한 상승이라는 환경의 변화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낙관론, 규제 완화, 그리고 급격한 환경의 변화는 앞서 다루어왔던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의 원인과 매우 비슷하죠. - 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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