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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 피난처 - 달아나는 세금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4
시가 사쿠라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2월
평점 :
38 사기동대 같은 것을 보며 탈세는 나쁜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저였기에, 탈세와 조세 회피가 다른 것이라는 건 짐작도 못했습니다.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국어와 영어의 지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문제, 즉 수학을 사랑하는 딸은 사회 과목 중에선 경제가 제일 마음에 든다지만, 전 경제라는 글자만 보아도 울렁거리거든요.
<조세 피난처>라는 책 제목을 보았을 때 첫인상은 그랬습니다. '역시 이와나미 신서의 오렌지빛은 참 적절하게 예뻐.' 마치 기능은 보지 않고 디자인만으로 가전제품을 선택하는 사람같이 표지만을 음미하고 있었죠. 예쁜 책을 손에 쥐고 이와나미 신서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하면서 책을 열었고, 이내 '큰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어조차 낯설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올해 수능 국어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PDF 파일을 내려받고서 27번부터 32번 (짝수형)에 해당하는 지문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강도의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과학 관련 도서를 읽고서 '전혀 어렵지 않아요. 쉽게 설명되어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 그것을 믿고 책을 읽었던 '과학과는 거리가 먼' 분들께 사과하고 싶어졌습니다. 이 책도 그럴 겁니다. 경제에 대해 보통 정도의 관심이 있는 분께는 쉽지만 저는 못 알아먹는 책.
필살기를 사용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처럼 문장을 요약해 노트에 적어가며 읽고, 그래도 모를 때는 강의자의 느낌으로 직접 입으로 중얼중얼 소리 내어 읽어가며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오호.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여세를 몰아 읽어나갔습니다. 중요한 건 용어의 이해였습니다. 저자가 무얼 말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데 책을 이해할 수는 없지 않나요.
저자는 친절했습니다. 제가 따로 사전을 찾거나 검색을 하지 않아도 책 안에서 제대로 잘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책은 친절합니다. 제가 모자란 것이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전보다는 1mm쯤 유식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덴마크의 빈부 격차가 크다는 딸의 말에, 그래도 지니 계수(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소득 분포의 상황을 나타내는 지표)가 낮으므로 소득 분배가 잘 이루어진 나라라며, 빈부 격차가 큰데도 이렇다면 복지 정책이 상당히 잘 된 나라라며 알은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는 2016년 기준으로 0.357로 전년에 비해 상향되었습니다.(근로 연령층인 만 18~65세는 0.371로 역시 증가했습니다) 소폭 증가이지만 빈부격차가 벌어졌음을 시사합니다. 책의 85 페이지 자료에 의하면 2008년 기준으로 일본의 경우 0.30 부근이었습니다. 빈부격차 심하다는 소문에 비해 너무 낮아 의아했지만 아마도 공표된 것이랑 실제가 많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조세 피난처란 편법을 이용해 세금을 적게 내려는 수작, 조세 회피에 이용되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런 장소는 탈세, 조세 회피의 수단으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마피아 같은 범죄 조직의 자금 세탁, 테러 자금 세탁 및 은닉에 이용되며 나아가 세계 경제의 대규모 파괴를 유발합니다. 세금이 없는 국가나 지역, 혹은 세금이 거의 없는 국가나 지역이 조세 피난처로 이용되는데, 흔히 카리브 섬같이 야자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을 애용합니다. 특히 부유층이나 테러집단이 좋아하는데요. 일단 이곳에 들어간 자금은 행방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애초에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 무턱대고 규제했다간 근근이 살아가는 섬주민의 생계에 지장이 생기므로 신중한 대처방안 모색이 필요할 것입니다.
실은 여기보다 군소 역외 금융센터의 문제가 더 심각한데,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의 금융센터를 피난처로 삼는 행위는 자국 경제 기반에 깊이 파고들어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울컥하고 짜증이 나는 건, 겉으로는 훌륭한 체하는, 런던과 뉴욕인데요.- 세계 3대 금융 센터가 런던, 뉴욕, 도쿄에 있으나 저자가 일본인이라 도쿄의 언급을 피한 건지, 도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지, 일본 기업은 도쿄를 피난처로 이용하지 않는 건지,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 - 실상은 그들 모두 조세 피난처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경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머니 게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니 화가 납니다.
국고로 들어가야 할 세금을 회피하여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경향은 조금 이해합니다. 탈세도 아니고 편법 좀 쓴다는 데 그게 무슨 문제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IMF를 겪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큰 문제라는 걸 인식할 수 있습니다.
자금 세탁 방지 기구(FATF), 금융안정위원회(FSB) 등의 기관에서 국제 룰을 조정하고 개입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조세 피난처 퇴치에 적극 나서는 체하며 자국 권익을 우선시하는 선진 경제 대국이 양심적인 행보를 보였으면 합니다.
시가 사쿠라의 <조세 피난처>는 생소한 용어 때문에 처음엔 어렵게 생각되었으나, 익숙해지니 일본의 전 대장성 주세국 관료로서 직접 겪고 느꼈던 것들을 생생하게 전해 듣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세금이 문명의 대가'라면 세금을 내는 사람은 그 대가인 '문명'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세 피난처는 그런 '문명'의 향유를 방해하고 더 나아가 '문명'에 재앙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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