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의 기생충
린웨이윈 지음, 허유영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저는 어떤 타입인가 하면, 타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를 포함한 모든 이가 어떤 중요한 선택을 했다면, 그건 나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므로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그 결정을 수용하는 편입니다. 부모님의 결정은 저에게도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을 고통받고 힘들었던 데다가 지금 제 우울하고 불안한 성격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므로 아주 쿨하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과거 부모님의 행동, 저의 행동과 결정이 모여 지금의 저와 제 아이가 되었으니 상처는 상처대로 두더라도 자존심으로 이겨나갑니다.- 솔직히 회피 성향도 다소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결국 버티다 보면 더 좋게 되겠지라는 희망으로 삽니다. 확실히 과거보다는 지금의 삶이 나으니까요. 

과거와 현재가 힘을 모아 만들어 낸 '나'라는 인간이 <우리 엄마의 기생충>의 저자 린웨이윈에게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과거의 그녀가 현재의 자신까지 잡아먹고 있었으니까요.- '현재'라기보다는 '현재'의 바로 직전이 더 어울리는 표현 같습니다. 
페이스북에서 별 갖가지 성향의 사람을 보며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내 생각과는 너무 다르다. 싫은 타입인데라고 구시렁대면서도 제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타임라인이 올라오는 걸 그냥 지켜보는 건,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으로 - 때론 한심하지만 저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사람도 있을 테니 함부로 활자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살고 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함이므로 저자의 글과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끝까지 읽기로 했습니다. 저자의 비호감에 메모장에 '내가 이걸 왜 읽어야 하나'라고 끄적이곤 줄까지 그었습니다. 그 아래 '난, 난 이걸 찾아야 해.'라고 덧붙였지만 말이에요.

린웨이윈의 엄마는 비록 사춘기 후엔 사랑한다, 귀엽다 표현하지 않았던 워커 홀릭 엄마였지만, 반복되는 유산 중에 얻은 딸이라 금지옥엽 돌봐주었다고, 제 기준으로는 그만하면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겉으로만 아껴주는 게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돌봐주는데 도와줘도 불만이고, 안 도와줘도 불만입니다.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봄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어설픈 상태에서 어른이 되어 중심을 잡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저로서는 그녀의 불만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이를 키우며 이제야 비로소 동반 성장하고 있는 저로서는 말입니다. 세로로 서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동전도 아니고 너무 양면적인 게 아닌가, 흑이길 원하면서 동시에 백이길 바라는 그녀의 이중성이 답답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향이긴 한데, 저자는 너무 지나쳤습니다. 
강박증에 우울증, 자해까지. 결혼 후에는 배우자 폭행, 공갈, 협박 같은 전형적인 가정폭력까지 행했습니다. 다행히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분노를 눌러 삼켜왔다고 표현할 땐 기함했습니다. 정말 분노를 누르는 게 뭔지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하면서요.
이렇게 미워하며 에세이를 읽어내려갔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책에 대만 출판계 최고의 상인 '금정장'을 준 걸까. 책을 읽으며 적었던 메모를 이틀 동안 들여다보며 고민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끝없이 저자를 통해 제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내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괴로움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숙주에 기생하지 않고선 살 수 없는 존재,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안으로 파고들고 숨을 수밖에 없는 존재. 저자는 당당히 독립하여 기생충이 아닌 독립 생물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생충이 아니라 공생충이 되면 좋았을걸. 세상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 완벽히 독립된 존재라는 건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걸.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에세이가 문학적 수정을 거쳐 어느 정도 가감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위한 장치가 놓여있다는 뜻인데요. 이렇게 한바탕 작가를 미워하며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그녀의 트랩에 걸려들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책을 읽은 모두가 나와 같은 과정의 사색을 했으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흐름에 따라 그녀의 아픔을 자기 것처럼 여기며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용감하게 이겨내는 과정을 밟는 그녀에게 손뼉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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