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삶을 살아가는 데는 수많은 역경과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슬기롭게 그것들을 넘기거나 지독한 노력 끝에 이겨나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저주하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수레바퀴에 올라앉아 한탄합니다. 때로는 그냥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마냥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올 수도 있거든요.
누구나 겪는 역경이나 부조리가 나에게만 있는 것처럼 한탄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이래서 안 돼, 저건 저래서 안 돼. 내가 뭐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 모양 이 꼴인 줄 알아? 내 부모가 이러지만 않았어도, 사회 제도가 이러니까, 사람들의 눈이라는 게 있잖아? 등등 갖은 핑계를 대면서 세상을 저주합니다. 함께 있으면 너무나 피곤해요. 물론 말도 안 되는 무한 긍정주의자는 짜증 나서 함께 있으면 더 피곤하지만요. 불평불만이 가득 차고 자기변호만 해대는 사람에게 -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에게 "그럼 죽지그래?"라고 시크하게 말을 던진다면 어떨까요? 갖가지 반응이 예상되는군요. 이 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아느냐, 그래 이 더러운 세상 확 죽어버리자,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위로는 못해줄망정 나 힘들었다고요 등등. 매를 버는 수도 있겠어요.
아 힘들어 죽겠어, 행복해 죽겠어, 짜증 나 죽겠어, 배고파 죽겠어, 기뻐 죽겠어. 


"너, 너 같은 사람이 내 고생을 알아? 싫어도 그만둘 수 없어. 괴로워도 헤어질 수 없다고. 괴롭고 또 괴로워서 살 수가 없지만, 이제 한계지만 그래도 멈추지 못한다고 빌어먹을!"
"어째서?"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은 모른다고 했잖아!"
"그럼 죽지그래."
겐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 죽으라고?"
"그래. 이봐, 그렇게 모든 것이 슬프고 힘들어서 미치겠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면 말이야, 정말로 어떻게도 할 수 없다면 살아갈 의미 따위도 없는 거 아냐?"
-p.55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이라고 하면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흘러가는 미스터리 한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요괴 연구가 이기도 한 그는 요괴가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 속에서도 인간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이한 존재를 느끼게 합니다. <죽지그래>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다만 이것은 요괴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자기애, 자기 보호, 이기심같이 나에게도 있고 누구에게나 있는 심리였습니다. 남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외치는 변명 같은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서는 괴로워서 살 수 없는 삶이니까요. 그렇다고 정말 죽어버리나요. 우리는 어떻게든 버텨나갑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겐지는 '죽지그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다면 그냥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변호를 하는 이들에게 호통칩니다.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게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해합니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삶이 있으니까요. 그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닙니다. 나쁜 건, 살해당한 여자 아사미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아사미가 살해당한 후 겐야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찾아가 그녀에 대해 묻습니다. 네 번 밖에 만난 적 없지만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 헌신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제대로 안돼 괴로워하는 데다 회사에서도 묘한 눈총을 받고 있는 중년 가장은 아사미와 불륜 관계였고, 능력도 있고 외모도 괜찮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해 불만이 가득한 이웃집 여자는 자신의 남자를 빼앗았다며 익명 문자 테러를 했고, 아사미의 기둥서방이랄까 주인님이랄까... 야쿠자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야쿠자 졸때기는 흔히 하는 말로 그녀에게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먹고 있었고, 미혼모로 낳은 아사미를 사랑해 준 적 없는 데다 결국 20만 엔 빚에 딸을 팔아먹은 엄마는 여전히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겐야는 그들 모두에게 "죽지그래."라고 말합니다. 
아사미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인데, 자신의 이야기만을 한다며 화를 냈습니다. 결국 형사를 찾아갑니다. 형사 역시 냉정한 태도로 법을 수호하고 있을 뿐인데 비난을 받고 있다는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사미의 이야기는 역시 여기서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데다가 형사의 태도에 화가 난 겐야는 이곳에서도 호통을 칩니다. 

 나쓰히코 소설의 가장 피곤한 점이라고 여겨왔던 것 중 하나는 묘사 없이 따옴표로 이어지는 등장인물의 대화였습니다. 어떤 소설에서는 읽다 보면 이 대사가 누구의 말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기에 무척 피로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죽지그래>에서는 엄청납니다. 계속 따옴표에요. 그런데 희한하게 절대 헷갈리지 않습니다. 각자의 성격이 명확한데다가 입장이 확실하기 때문에 구분이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분해야겠다는 것까지 잊고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배경도 단순해서 연극 무대라면 의자 두 개와 조명만으로도 공연이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미스터리 부분에서는.... 제가 읽은 미스터리가 많아서 그런지 대략의 사정은 일찌감치 짐작해버렸지만, 그것보다 심연의 괴로움에 대해 읽어가며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즐거움이었습니다. 등장인물의 변명에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저렇지 않다며 위안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기도 하는 걸 깨닫고 잠깐 부끄러웠습니다. 변명하는 저에게 겐야가 "죽지그래."라고 말하면 반드시 말문이 막히는 일 없이 끝까지 싸울 거예요. "이보게 젊은이, 세상은 그렇게 흑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네."라고 말할지도 몰라요. 꼰대처럼 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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