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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의 마녀 ㅣ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엔 반드시 경미한 사고와 징후가 있다는 -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엔 작은 사건이 29건, 그리고 사고가 일어날 뻔한 잠재적인 일 300건이 있다는 건데요. 원래는 노동 현장에서 적용하여 사소한 작은 징후들도 무시하지 않고 잘 처리해야만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만, 노동 현장뿐만 아니라 세상의 대형 사고뿐만 아니라 자연재해까지 적용할 수 있기에 그 의미가 큽니다.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기지 않고 대비를 하면 인간 생존에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정말 작은 것이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습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래도 어떻게든 주의를 기울이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여기까지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 겁니다. 맞은편 다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울림이 내가 서 있는 다리에 금이 가게 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눈치챌 수 있겠어요. 마도카라면 몰라도.
<라플라스의 마녀>의 등장인물인 마도카가 그런 일을 했다는 건 아닙니다. 엄마를 잃은 소녀 마도카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예언가 같기도 하고, 일견 마법사 같기도 합니다. 손에서 공이 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어디에 떨어질지 알 수 있다거나 멀쩡한 하늘을 보며 몇 시쯤부터 비가 오기 시작할 거라는 걸 아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에요. 중세 시대 마녀의 일 같지만 현대의 소녀 마도카는 모든 물리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냥'알 수 있습니다. 토네이도가 엄마를 앗아간 보상으로 그녀에게 내린 재주일까요? 아니면 저주?
나이 많은 영화감독이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합니다. 근처에 온천이 있긴 하지만 보통 사람은 잘 가지 않는 길에서 말이에요. 그의 젊은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발견하고 신고합니다. 그녀가 받을 유산과 사망 보험금 때문에 경찰은 타살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그런 징후는 없었습니다. 한편 온천 측에서도 가만있을 수는 없죠.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람이 죽은 온천이라니. 그렇게 위험한 곳에 과연 누가 목숨 걸고 찾아올까요. 이에 아오에 교수는 현장의 안정성을 검증 해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른 온천지에서 벌어진 황화수소 사망 사건까지 검증에 나서는데요. 이 두 곳에서 마주친 마도카를 만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과학 그 자체인 소녀에게 호기심과 의문을 갖습니다.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이 소설 <라플라스의 마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미스터리 소설들과는 조금 달리, 탐정 역할의 인물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주체가 되어서 의혹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이야기는 마도카, 마도카의 보디가드 다케오, 아오에 교수, 나카오카 형사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흘러갑니다. 관찰자 시점이긴 한데, 속마음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철저히 나 자신이 탐정이 되어 사건을 따라가야 합니다. 천천히 알게 되어가는 진실들에 고개를 젓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데뷔 30주년 기념작인 <라플라스의 마녀>는 이제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쓰고자 했다고 합니다. 다작할 뿐만 아니라 소설의 색채도 다양해 여러 가지 맛을 볼 수 있었던 그의 소설들을 대부분 읽었습니다만, 확실히 이번의 <라플라스 마녀>는 색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의 과학 기반 소설을 무척 좋아합니다. 반도 못 알아듣지만,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찾아봐가며 읽는 편입니다. 이 책에서는 난제로 남아있는 물리, 수리학의 여러 이론을 대입하며 고차원 방적식을 풀듯이 읽어나가다 보면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이론들이 너무 심오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도 이해를 못했다는 건 분하지만요. 전공자가 아니라면 잘 알 수 없는 부분들이겠지만 뭔가 막혀있는 건 답답하거든요. 그래서 스토리 흐름에 좀 더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하루가 지나 곰곰이 되짚어가며 생각을 해봤더니,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 비해 감정선이 약하더군요. 뭔가에 호소하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가독성은 좋아서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소설임에도 쿵! 한다거나, 찡! 한다거나 하는 장면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어릴 시절 황화수소 사건으로 엄마와 누나를 잃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한 겐토의 사연에서도, 최고의 뇌의학자를 아버지를 둔 마도카의 이야기에서도, 젊은 며느리가 나이 든 자신의 아들을 해코지 할 것 같다고 제보했으나 경찰의 무관심 속에서 정말로 죽어버린 아들에 마음 아파 자살한 할머니의 사연에서도, 제 마음은 평온했습니다. 감정을 누비는 글이 아니라 보고서를 읽은 것 같았어요. 무미건조하지는 않았지만, 수분이 별로 없는, 반 건시 같은 그런 기분이었을 거예요. 그런 점은 좀 아쉬웠지만,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좋습니다. 좋아요. 전 과학이 들어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