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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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주 어릴 때, 고열과 구토로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응급실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끝내 의사에게 큰소리로 항의하는 진상을 부렸습니다. 괴로워하는 환자에게 적절한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제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응급실당직의의 입장에서는 별일이 아니었을 그런 사건이었던 것도 같습니다만 애초에 그 의사는 내과적인 처치를 할 줄 모르는 다른 분야의 선생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개 응급실을 찾을 때는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고요. 환자로서, 보호자로서도 마찬가진데요. 저는 참 드물게도 멀쩡한 정신으로 가본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한밤중 갑자기 복통을 일으킨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던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는 평소 걸어 다니는 약국이라고 불릴 만큼  건강 염려증이 심한 분이었던 데다가 엄살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서 배가 아파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실 때에도 사실 미심쩍었습니다. 정말 그만큼 아픈 걸까? 그렇지만 혹시 맹장염일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적어도 스스로 걸을 수 있으실 때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한다는 어린 마음에 -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을 겁니다 - 택시로 아버지를 응급실에 모셨었죠. 정말 창피했습니다. 아버지의 엄살은 그치지 않았거든요. 그냥 배탈이었어요. 어쨌든 응급실에 계시는 분들은 그런 사람에게도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을 귀찮게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고요. 저희 아버지는 주사 맞을 때도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셨거든요. 민망했습니다.

응급실엔 엄살쟁이들이 다녀가기도 하지만 - 참, 타인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수도 있어요- 실제로는 생사가 갈리는 곳입니다. 저 역시 응급실이라는 곳에서 새 생명을 부여받은 후 깨달음을 얻어,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좋다는 자세로 이날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의사 선생님께 야단맞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나무라셨거든요. 저 뿐만 아니라 보호자로 온 사람들도 야단맞았어요. 저는 지금껏 제가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사람으로 가까운 이들을 생각했을 뿐, 상처 입은 자 명단에 의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들도 살려내지 못한 환자들에 대해 큰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은 없다>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남궁인이 실제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복기하듯 기록한 책입니다. 그의 글에서는 고통이 느껴졌고 슬픔, 회한이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이토록 무서운 책은 읽은 적이 없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죽어갑니다. 원했던 죽음도 있었고, 거부하고 싶었던 죽음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대부분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이며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응급실의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겪고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원해서 의사의 길을, 간호사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들은 선택의 무게보다 더 큰 것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살려낸 일, 폭력으로 죽음에 가까워진 이를 살려내지 못 했던 일, 죽는 것이 오히려 평안하다는 걸 알면서도 의사이기에 몇 번이고 살려야만 했던 그의 경험이 마치 내 것인 양 알알이 박혔습니다. 

무겁고도 슬퍼 한 번에 읽지 못하고 쉬기를 반복, 꿈에까지 찾아와 저를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챕터 2 '알지 못하는 세계:삶에 관하여'에서는 조금이라도 웃을 일이 생기더군요. 그렇다고 다치는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래도 경계의 이쪽에서 바라볼 수 있어 조금은 편했다는 이야기지요.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10월 사서 추천도서로 선정된 책입니다. 저 역시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만 무게를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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