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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한 화학자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난 유태계 이탈리아인인데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화학과를 졸업 한 후 반파시스트 지하운동에 참여하다 결국 체포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제3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합니다. 다행히 살아남아 전후에 화학자로서,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1987년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이 책은 1975년 발표된 그의 세 번째 회고록인데요. 회고록이라고 해도 좋고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기율표라고 하면 누구나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periodic table)을 떠올릴 텐데요. 저도 그랬습니다. 수소로 시작하는 바로 그 표 말이죠. 그래서 이 책의 목차도 수소로부터 시작하겠거니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고 있었지요. 저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때, 화학자가 쓴 주기율표대로 진행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과연 수소, 헬륨, 리튬을 이어 베릴륨을 지나가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책은 그런 가볍고 발랄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아르곤부터 시작합니다.
Ar. 18번 원소로 대기의 거의 1%를 차지하고 있지만 비활성기체로 반응성이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아르곤이라는 이름이 그리스어의 'argos'(게으름뱅이)에서 온 것을 생각하면 참 성격대로다 싶은데요. 반응성도 거의 없고 활성화되지도 않는 거, 별로 필요없는 것 아닌가 싶지만, 그렇다고 없애도 괜찮은 녀석은 아닙니다. 책의 첫 번째 아르곤 챕터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수많은 모르는 단어와 호칭들이 등장합니다.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에 그에겐 익숙하지만 저에겐 무척 낯선 사람들이 소개되고 등장합니다. 호칭이나 이름들이 너무나 생소해서 이들의 이름을 모두 메모해두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바람에 사실 좀 두려웠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러면 어쩌지,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지... 그러나 아르곤을 무사히 넘기고 나니 편안해졌습니다. 저에게 낯선 것들이 사라졌거든요.
작가는 주기율표에 있는 원소들을 하나씩 챕터의 제목으로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마치 소설처럼 담담하게 말이에요. 원소번호 순서대로가 아니라 그의 인생 순서대로 원소가 등장합니다. 그의 유년시절 친구와의 소소한 실험 끝에 커튼을 태운 이야기라거나(수소) 아우슈비츠에서의 세륨 덕분에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가 철학적으로 그려집니다.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즐겁게. 주기율표에 인생을 담을 수도 있다니 대단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창작물(소설)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책을 잘 못 읽고 있나 당황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제자리 - 그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무척 기뻤습니다.
책 속에서의 그는 - 실제로도 그랬지만 - 화학자였기 때문에 실험하는 장면이 무척 많이 등장합니다. 고전적인 방법으로(그럴 수밖에!) 정량분석을 하고 미량원소 추출을 하거나 회분(Ash) 분석, 염이나 앙금을 얻는 장면들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변변찮은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실험하는 것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수은 챕터에서는 좀 아찔하긴 했지만요.
심각하지만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문장도 무척 좋아서 독서 중에 잠시 책을 덮고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사색해보기도 했습니다. 생각거리를 많이 던지거든요.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조금 어렵지만 권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