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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ㅣ 스토리콜렉터 4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봤던 것만 같은 장면,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풍경들... 분명 낯선 것들인데도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기이한 현상을 기시감(데자뷔)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한 번 이상 겪어봤을 법한데요. 보통은 '우와, 신기해. 나 전에 이 장면 본 적 있는데!' 라거나 '꿈에서 봤는데!'라고 말하며 호들갑을 떨거나 몸을 한 번 부르르 떠는 것으로 그치고 말죠. 그러나 이런 기시감이 연달아 일어나고, 심지어 자신을 삼키려 든다면 과연 어떨까요.
기시감이라는 것은 실은 인간의 착각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과거 기억의 파편들이 흩어져있다가 어떤 계기로 각각 다른 조각의 것들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 내는데, 그 아귀가 정확히 맞아들지 못하면 뇌에서는 빈 공간을 채워 넣으며 그림을 완벽하게 재구성하게 되죠.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보고 있던 것이 과거의 것과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전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에 느꼈던 것처럼 여기고 마는 것입니다.
<화가>의 코타로의 경우도 그런 과학적인 이유에서 느낀 기시감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다면 이 모든 일들을 소년 시절의 신기한 느낌으로 추억할 수 있었을 텐데요.
부모님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시자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 코타로는 시골의 한마을로 이사합니다. 도시의 연립주택에서의 생활은 버겁게 느껴졌었겠지요. 할머니의 수입으로 이런 단독주택에 살게 되다니 이상했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임대를 받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딘가 석연찮습니다. 이상합니다. 이 마을이, 이 집이 낯설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 마을과 이 집에 왔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겁니다. 낯설지 않아 적응하기 좋겠다는 생각보다는 불쾌한 느낌이 먼저입니다. 이사 온 첫날, 동네의 -약간 정신이 나간 것 같은 - 노인에게 "꼬마야, 다녀왔니....?"라는 인사를 들은 것도 찜찜합니다. 그래도 좋은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레나라는 소녀를 만났거든요. 동갑내기에 매력적인 소녀 레나. 붙임성도 좋은 것 같습니다.
코타로는 이 집에 오기 전부터 악몽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어두운 공간에 갇혀있는 악몽. 별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떱니다. 이윽고 세로로 길쭉한 빛이, 가느다란 빛이 나타나고, 희망을 얻은 그가 빛으로 나아가려 하면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꿈. 동네의 숲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악몽이 떠올랐습니다. 이사를 하고 나면 좋아질 거라 생각했건만.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 꿈의 조각들이 집 안에서 현실로 나타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면 괴이한 것들과 소리에 사로잡히는 코타로. 이 집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것에게 먹혀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과연 이 집은 코타로에게 무얼 원하는 걸까요? 코타로는 집에서, 마을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요?
<화가>는 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중 첫 번째 이야기로 북로드에서는 <흉가>에 이어 두 번째로 출판하였습니다. 실제 순서는 화가- 흉가의 순이지요.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으므로 따로 읽어도 무관합니다. 이번의 <화가>역시 <흉가>에서처럼 집과 소년, 그리고 토속 신앙이 한데 엮여 공포감을 줍니다. 처음엔 그다지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평이하군. 역시 나는 이제미쓰다 신조의 소설 정도는 평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나 보다 하며 눈을 반쯤 감고서 읽어나가기 시작했지요. 한참을 재미있게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위로 솟아올라있는 어깨로 인해 통증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잔뜩 긴장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쉰 뒤 뻣뻣해진 목덜미와 어깨를 풀며 다시 읽었습니다. 코타로의 무사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