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지만, 이로써 황금가지에서 나온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은 다 읽었습니다. 송시우의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얼마 전에 읽은 <달리는 조사관>에 수록된 단편이므로 읽지 않고 건너뛰었습니다. 무척 매력적인 이야기였지만요.
첫 번째로 수록된 도진기의 '악마의 증명'편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법정 반전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범죄를 저지를 자가 자신이쌍둥이임을 이용해서 법정을 상대로 뻔뻔한 트릭을 사용하는데요. 검사의 대처법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방법으로 기소가 가능한 걸까요? 현직 판사이신 도진기님이 쓴 소설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긴 한데요. 소설이라서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유철의 '빈집'은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사채를 쓰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고, 결국 빈 껍데기만 남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우울한 소설이었습니다. 참, 친인척에 관한 호칭 오류가 있더군요. 소설 속에서 '처형'과 의논한다길래 아내의 언니와 의논하는 줄 알았더니만, 그러니까 처형의 남편, 즉 자신에게는 동서가 되는 사람을 내내 처형이라고 부르더군요.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요. 오류 때문에 살짝 흔들렸습니다.
정명섭의 '시장의 살인'은 벌써 여러 번 만났던 문달과 설천이 등장합니다. 역시 고려 말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인데요. 저잣거리에서 애꾸 사내의 시신이 발견되자 이를 해결하러 나서는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가 본적도 없는 시대의 모습이 눈앞에 선한 것이 정명섭 작가님의 고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공부하는 작가님의 소설이 정말 좋아요. 공부를 하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작품에 녹아내는 그런 면이 멋집니다. 반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한이의 '유실물' 편은 슬펐습니다. 1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지갑이 갑자기 남한산성에서 발견됩니다. 갑자기 그 지갑은 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발견되었을까요? 마지막에 싸아아하고 몰려오는 - 작가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 때문에 무섭고, 슬퍼집니다. 어두워요. 그렇습니다.
이나경의 '오늘의 탐정'. 하하핫. 이 탐정. 뭐죠? 실은 우리나라에서 탐정이란 아직까지 합법적인 존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뭔가 멋진 일은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급식비 도난 사건이나 동네 쓰레기 무단투기 사건 같은 걸 조사하러 다닙니다. 일상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탐정. 정말 생활 밀착형 탐정입니다. 좀 영리한 동네 아저씨 같아요. 재미있습니다.
전건우의 '은둔자(들)' 제목이 단수도 아니고 은근슬쩍 복수잖아요. 처음엔 왜 그랬는지 몰랐습니다. 이내 알게 되더라고요. 정치인을 암살하고 한 달만 숨어지내면 돈다발과 하와이의 푸른 해변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킬러는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일이 꼬여있다는 걸 눈치챕니다. 이런 젠장. 거기 숨은 건 사람이냐 귀신이냐! 전건우의 소설에는 '물'이 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아무튼. 적어도 제가 읽은 것들 중에서는 물이나 습기가 느껴지는 단편들이 많았습니다. 축축하거나 눅눅한, 그런 음기가 흐릅니다. 이번 소설도 그렇습니다. 하아....
이작의 '물뱀'은 좀 슬픕니다. 워커홀릭이었던 의사 아버지의 딸은 어느 날 사고로 익사하고 얼마 후 그녀의 남자친구도 같은 곳에서 익사합니다. 정말로 무자천의 물뱀이 그들을 끌고 들어가 버린 것일까요?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슬픔이 남습니다.
이대환의 'M 병원의 기적' 편에서는 존 쿠삭 주연의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영화냐고요? 비밀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저의 감상은. '으, 워!'입니다.
윤해환의 '협찬은 아무나 받나' 편은 .... 읽다 말았습니다. 필명 윤해환, 지금은 본명인 조영주를 사용하고 있는 작가의 트위터 탐정 설록수 시리즈 중 하나인 이 단편은 설록수가 아이돌 그룹 머메이드 세븐 중 한 명이 협찬받은 고액의 귀걸이 실종 사건을 해결하는(해결하는 건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 내용인데요.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습니다만 별로 저랑 맞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나온 '붉은 소파'는 무척 반응이 좋던데요. 설록수는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끝까지 읽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대한 만족도는 대체로 좋은 편입니다. 각각 개성이 있고, 내용의 흐름이 좋아서 편하게 - 아니, 스릴러를 편하게 읽다니! - 읽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