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었던 소녀 스토리콜렉터 41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4월 1일 뉴욕에서는 거짓말 같은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40여 년간 존경받고 사랑받아오던 한 선생님이 과거에 자신의 여학생과 성적으로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에 한 명 1980년대에 한 명. 가해자는 미국 보딩 스쿨협회장을 지내는 등 학교 외에서도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대다수의 졸업생들은 그를 '어려운 시기에 용기를 주는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피해 학생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게다가 그 당시라면 선생님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해보았자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며 도리어 손가락질 받을 시기였을 테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몇 년 전 학교 보건 선생님에게서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선생님의 말을 간추려본다면 남자 선생님들에게 종종 여학생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상담을 받는다. 여학생이 자꾸만 남자 선생님에게 들이대는 데 별수 있느냐, 여학생과 선생님의 부적절한 관계는 - 그분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 전적으로 여학생에게 있다. 남자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충격적이었습니다. 보건 선생님은 학생의 성교육 및 성에 관한 문제가 생겼을 때 상담하고 대처하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만일 문제가 생겼을 때 이런 선생님에게 학생이 상담을 받아야 한다니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신의 남편인 교수가 여학생하고 추문이 있었나 봅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더군요. 자신의 남편은 잘못이 없는데 학생이 자꾸만 유혹했다. 그러니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시에나가 빌리에게 얼마나 애착을 느끼게 됐는지 알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고든한테도요. 그 아이는 제 남편을 짝사랑했어요. 어느 날 밤, 고든이 걔를 집에 데려다줬는데 그 애가 남편한테 입을 맞추려고 했어요."

"고든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실제로 그랬어요." 목소리가 날카롭다. "고든은 무척 속상해했어요. 그 애 부모님하고 학교에 그 일을 말했죠. 그래서 그 애는 우리 애를 봐줄 수 없게 됐어요. 대신 찰리가 그 일을 하고 있죠."

-p.316

사랑이라는 이름의 달콤함에 넘어가면 판단력이 흐려지게 마련입니다.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는 남편과 여학생과의 관계에서 무조건 남편을 믿기에 여학생이 잘 못 한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데다가 남선생님들과 문제가 생기는 모든 여학생에게까지 그 범위를 넓혔습니다. 남자들은 잘못하지 않는다. 여학생들이 문제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여학생이다.


"그 애는 당신한테 특별했지."

"모든 학생들이 다 특별하죠."

"그래. 그렇지만 어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특별하지. 어쩌다 한 번씩 어떤 여자아이가 무리에서 두드러지고, 그러면 당신은 그 아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지. 가장 뛰어나거나 가장 영리하거나 가장 예쁜 아이는 아니지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지. 이용할 만한 어떤 약점이나, 혼내주고 싶은 거만함."

고든이 고개를 젓는다. "짝사랑에 빠진 건 걔지 내가 아니에요."

-p.336


마이클 로보텀의 <내 것이었던 소녀>에도 그 보건 선생님처럼 남편을 굳게 믿는 아내가 등장합니다. 남편이 여학생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고 의심받는 데도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짝사랑하던 자신의 남편을 유혹하려다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존경받는 선생님이니까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고든이라는 이름을 부르라고 하고 마음을 잘 읽어줍니다.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주인공 조 올로클린의 딸 찰리도 그녀의 친구 시에나도 선생님을 좋아했습니다. 시에나는 그 집의 베이비시터를 하러 다니며 자고 오는 날 도 있을 정도로 선생님과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에나는 온몸을 아버지의 피로 적신 채 찰리의 집에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듯이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시에나의 언니는 아버지가 자신과 시에나를 건드려왔다고 이야기합니다. 헛간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아동 포르노물들이 그녀들이 그간 겪은 성적 학대를 증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 주장합니다. 시에나의 정신감정을 자발적으로 담당한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은 그녀가 보호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고든이라는 것을 알고 혐의를 그에게 돌리지만, 그 역시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경찰은 시에나가 범인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조는 그녀가 아니며 누군가가 분명 - 고든이 아니더라도 - 있을 거라며 사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파킨슨병이 그를 때때로 힘들게 하며 그의 육신을 조종하지만  실은 정신적인 면이 더 힘들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아내 줄리안과 딸 찰리가 위험에 처했던 일로 비 온 뒤에 땅이 굳기는커녕 늪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벌써 2년째 별거 중이고 다시 회복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약간의 애정결핍 증세를 보이는 조는 상당히 예민해져 있습니다. 냉철하게 판단하기는 하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는 실패합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 편에서보다 좀 더 부서져 있습니다. 저는 그를 알기에 그를 응원하지만, 주변 인물들은 그에게 푹 빠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번번이 어려움에 처하거든요. 다른 소설들 같으면 주인공이 어려움에 빠져도 지인들이 척척 구원해주더구먼, 이 소설에는 주인공 버프가 없습니다. 버프는커녕 약이나 제시간에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약 먹기도 참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에나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기억이 트라우마적인 과거 사건들의 저장소라고 말했지만, 그 사건들은 실제라기보다는 단순한 망상일 때가 많다. 현실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우리 마음은 존재하지 않은 것들과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의 망대한 저장고다. 나는 가끔 내 기억들이 진짜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것들에 집중해서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려고 애를 쓰면, 기억이 내 목을 틀어막아 나는 숨을 쉬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

-p.120


책은 연속으로 읽기 힘들었습니다.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무엇 때문에 잠시 덮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녀의 판단력을 흐리고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들. 소녀가 한 것은 사랑이지만 그들이 한 것은 유린이었습니다. 어째서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소설 속에 숨어서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지 세상으로 튀어나와 소녀들을, 여자들을 괴롭히는 것일까요. 그런 생각들이 저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사건은 끝났지만, 시에나는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파킨슨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 신약이 나왔다는 뉴스를 본 것 같습니다. 조 올로클린에게 알려주고 싶네요. 아니, 이미 알고 있겠군요. 의대 동기들이 이야기해주었을 테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