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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은 1920년대 독일의 쿠르트 슈나이더가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말합니다. 평소에는 그들을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조용하기 때문에 알아채기 힘들지요.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그들이 숨겨왔던 증상들이 폭발하고 맙니다. 유전적이거나 뇌의 일부 기능이 차단되거나 호르몬계의 혼란으로 야기되기도 하는데요. 그들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내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모두 적이며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요.
<검은 집>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보험 사기와 아동학대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읽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각종보험 사기나 클레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보험회사 직원 신지가 클레임을 해결하러 한 고객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 집에서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목매달아 죽은 아이의 시신은 마치 신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었고, 어릴 때 추락사 한 형의 일에 대한 죄책감과 겹쳐져 신지는 깊은 괴로움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 일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경찰은 자살은 아닌 것 같지만 타살은 아니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렸고, 죽은 아이의 아버지, 고모다는 오래전 보험금을 타기 위해 손가락을 절단했던 전과가 있으므로 혹시 보험금을 위해 아이를 죽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신지는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부부는 자신들 각각 3000만 엔, 아이에게는 500만 엔의 보험을 들어두었었는데, 그들은 매월 납입해야 하는 보험료를 감당하기에는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신지에게 시신을 목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았고, 만일 고모다가 아이를 죽인 것이라면 그의 부인 사치코 역시 조만간 큰 화를 당할 것만 같아 더욱 두려웠습니다. 신지가 방문했던 고모다의 집은 짙은 향기와 악취가 뒤섞인 것 같은, 오오라를 느낄 수 있다면 끈적끈적한 타르가 온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검은 집이었습니다. 신지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고, 고모다는 보험금의 지금이 늦어진다는 항의를 하기 위해 매일 같이 보험회사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신지와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흉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지요.
희뿌연 공처럼 생긴 작은 물체. 커다란 공 주위를 몇 개의 작은 공이 감싸고 있었다.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죽어버린 것이리라.
어미 고양이의 것 같은 중앙에 있는 커다란 목은 둔탁한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새끼를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처절하기 짝이 없는 형상이었다.
-p.289
이 소설 <검은 집>은 1997년 제4회 일본 호러소설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그의 데뷔작 <13번째 인격>은 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요. <검은 집>은 무척 대단한 소설이었습니다. 1997년의 작품이기에 스토리의 익숙함으로 범인이 누구며 어떻게 된 일인지 소설의 중반쯤에 이르러 모두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필력 때문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용이 궁금해서, 결말이 궁금해서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검은 집으로 빨아들이는 그의 묘사력에 사로잡혀버린 것이었지요. 무섭고, 두렵습니다. 장면들이 눈앞에서 끔찍하게 펼쳐집니다. 그러니 보험 사기 이야기도, 아동 학대 이야기도 이 책을 닫을 즘에는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범인의 광기가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