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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 ㅣ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0
도진기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평점 :
장편은 장편대로의 맛이 있고, 단편은 단편대로의 맛이 있는데, 각자의 장단점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소설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자면, 장편을 만들었으면 좋을 것 같은 소재를 단편화하면 무언가 이야기가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콘티를 흝어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하면, 중단편의 소재를 장편화하면억지로 이야기를 길게 늘인 것 같은 산만함에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장편을 쓰는 것보다 단편을 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인데요. 길지 않은 지면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절한 리듬으로 채워나가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저는 나이를 먹을수록 초반 집중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데요. 장편의 경우 약 15페이지 정도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고 있다가 서서히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나가며 화면을 메꾸고 있습니다. 100페이지쯤 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왕왕 있지요. 그러니 단편소설인 경우 아차 하면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 소설이 무슨 소설인지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연작 단편도 아니고 각기 다른 작가의 소설들이 모여있는 단편집인 경우에는 더 큰일이지요.
그러나 이번에 읽은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는 대체로 몰입도가 좋았습니다. 초반부터 시선을 잡아끌고 작품에 매어놓는 솜씨가 베테랑의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몰입에 실패한 작품도 있었지만 그건 제 자신의 산만함 때문이니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단편의 장점을 살려 한 편을 읽고 다른 일을 하다가 또 한편을 읽고 또 잠시 휴식하다를 반복하며 10개의 단편을 모두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익숙한 작가의 소설이 더 기대되게 마련인데, 지나친 기대를 하면 곤란하다고 스스로를 자제시키며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고 소설을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지요.
도진기님의 <시간의 뫼비우스>는 정말 의외였습니다. 육체는 그대로이지만 의식만이 끊임없이 19세의 자신으로 돌아가 같은 생을 반복하는 48세의 판사는 그 끝없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게 만들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되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그러나 그 속에서도 탈출구를 찾아 나서는 그의 이야기가 비과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의 생이 거지 같든 행복하든 단 한 번이기에 소중하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연초에 읽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제 목표가 '잘, 살아남자.'거든요.
송시우님의 <잃어버린 아이에 관한 잔혹동화>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호칭이 무척 특이했습니다. 짠 내 나는 홀어머니, 실종된 아이의 엄마, 높은 집에 사는 여자 등으로 부르는데요. 어투 역시 동화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마치 동화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가 각자의 사정으로, 이기적인 이유로 행동하는 그것이 동화 속의 잔인함과 같아서 더욱 마음이 조여들었습니다. 심장은 두근두근거리는데 나는 불안해하며 사건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바닷가에서의 진한 해무를 느껴 본 사람이라면 더욱 진한 상상을 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던 전건우님의 <해무>는 영도 바다의 해무를 떠올리며 탄생되었다고 하지만, 저는 제주의 해무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우울하고 짙은 안갯속에서 차갑고 눅눅하고 짭조롬한 바다 냄새가 입안에 돌았습니다.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것과 같은, 오랫동안 느껴보아야만 알 수 있는 바닷가의 뼈가 시큰거릴 만큼의 습기. 주인공은 해무 마을의 박무당이 전해준 순자의 죽음 소식을 듣고 25년 만에 마을로 찾아갑니다. 순자가 왜 이제 와서 죽었을까. 고민하는 사이 소금기 품은 안개는 어느새 다가와 그를 삼켜버립니다.
다른 7개의 단편들도 모두 좋았습니다. 아주 좋고, 조금 좋고, 그냥 좋은 차이는 있었지만요.
전체적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추천할 만하고요.
한국 추리 소설들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올해도 많은 한국 작가들의 소설을 만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