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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ㅣ 한창훈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1959년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강타해 많은 피해를 낳았던 태풍 사라호 때의 이야기로 이 책은 문을 엽니다.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8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았던 이 태풍 속에서 항해를 하다가 모두가 포기 했을 때 5일만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팔경호의 이야기였는데요.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바다 사나이들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배는 바다의 유목민이다.
모든 경계를 무시하고 이동하라. 그러면 존재할 것이니.
흔적을 붙들고 사는 농경민과 달리
유목민은 제 흔적에서 빨리 멀어진다.
배의 자리는 늘 멀고 먼 낯선 항구에 준비되어 있다.
- p.95
저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곳이나 내면이 암울하고 칙칙한 소설은 잘 못 읽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서 위트를 빼고 나면 저 역시 그들과 다른 바 없는 처지이기에 나 자산의 우울에다가 타인의 우울까지 얹어버리고나면 정말이지 끝없이 가라앉을 뿐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 이를테면 재벌가 자제들이 나오는 그런 소설을 즐기는 건 아닙니다. 별로 관심이 가지 않거든요. 이런 것들을 분류하며 생각하다보면 결국엔, 나에겐 확실한 취향이라는 게 없고 그때 그때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한창훈의 에세이에는 제가 싫어하는 우울함, 외로움, 거친 사나이, 만취... 이런 것들이 다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이니 매력적인 것이 되더군요. 비린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제가 바다내음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걸까, 술취한 사람들은 싫지만 대학로의 골목을 걸으며 조리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불빛들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이 책을 제가 왜 읽고 있는지 이해를 못하면서 끝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작가가 어린, 사춘기 시절에 겪었던 소년의 성적 호기심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되는데, 그것마저도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요?
<내 밥상위의 자산어보>와는 확실히 다른 책입니다. 그 책이 풍성한 바다의 먹거리를 전해주었다면, 이 책은 더 남성적이며 바다에 가까운 책입니다.
삶과 죽음이 한순간이다. 재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를 물어볼 틈도 없이 찾아온다. 그게 오면 우리가 만들고 이루어냈다고 뻐기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웃의 참사를 대할 때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는 정도이다. 무기력하다. 자연 앞에서의 겸손, 이라는 흔해빠진 말이 새삼 무겁고 아프다.
-p.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