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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오픈 ㅣ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김이환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4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어느 날 낯선 남자가 다가와 흰색의 상자를 내밉니다. 상자가 원하는 것을 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상자가 원하는건 무시무시한, 혹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그런 물건들이죠. 이를 테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가씨가 떨어뜨린 휴대폰이나 귀걸이 한짝, 다른 사람의 양말 한짝, 열쇠고리 같은 걸 원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엔 말이죠. 가끔은 거액을 요구하거나 생명을 요구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욕심을 부려도 좋은 상자인데요. 다음 지하철이 들어 오기 전까지 타인의 양말 한짝을 구해다가 넣으면 2등에 당첨된 로또를 준답니다. 글쎄요. 글을 읽고 있거나 말로 전해 들으면 그런 수상쩍은 거래에 누가 응하겠냐고, 그 남자가 널 놀리고 있는 건 아니냐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앞에서 들이댄다면 잠시 망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자는 하얀색의 큐브입니다. 어디로 여는지 알수 없어 이리 저리 살펴보다보면 조그맣게 open이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보입니다. 그곳이 입구이죠. 그 입구를 통해 상자가 원하는 것을 넣기도 하고, 원하는 것이 물질적이고 작은 것이라면 꺼낼 수도 있습니다. 상자가 원하는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자기의 욕심만 채우면 안됩니다. 상자가 화를 내거든요.
상자에게 결혼상대자를 원했던 그 남자는 상자가 원하는 먹이를 제때 주지 않아서 결국 무소유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상자가 언제나 무섭기만 한 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같던 밤에는 꼬마를 구해냅니다. 산타의 붉은 빛이 아닌 또 다른 끈적하고 끔찍한 붉은 색으로부터 구해내지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함에 갇혀있던 엄마도 구해주고, 노인에게는 삶의 중요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런 글들 읽는 저에게도 많은 것들을 전해주고 구해주지요.
마지막의 이야기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또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해냅니다. 이 상자를 들고 다니는 남자는 저승사자인지, 천사인지 악마인지 알 수 없습니다. 상자를 손에 쥐는 사람에 따라서 그는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저의 경우엔 어떨까요? 일단 낯선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받는 것을 꺼립니다. 그리고 소원을 들어 주는 상자라니 너무 수상쩍지 않나요? 우리집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예쁜 구슬이 있습니다. 흔들면 맑은 소리가 나지요. 그러나 구슬에게 소원을 빌지는 않아요. 모든 일에는 댓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이 구슬이 아니어도, 이 상자가 아니어도 소원을 이루려면 댓가를 지불해야하지요. 그게 간절한 기원일 수도 있고, 꾸준한 노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댓가가 없이 이루어지는 건 없습니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항상 같은 양을 유지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저는 상자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 상자가 나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너무 큽니다.
결국, 겁이 많아서 받을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