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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평점 :
그림자는 항상 광원의 반대쪽에 생깁니다. 광원의 숫자에 따라 그 수 만큼의 그림자가 그 반대편에
생기는데요. 그렇다면 화려한 도시의 수 많은 빛이 어두움을 낳았다고 보아도 좋을까요? 시골이라고 해서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쩐지
도시에는 더 많은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람의 발 아래 드리우는 그림자도 그렇지만, 검고 어두운 분위기, 범죄, 인간의 내면도
한 몫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들은 밝은 빛으로 치유 할 수 있을런지.
그림자는 어두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곳에서 따르며 도움을 주는 존재도 그림자라고
하지요.
정확히 나와 같은 존재이면서 나와 언제나 함께하며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있다면, 친근함과 두려움을
함께 갖게 될까요? 요코야마 히데오의 <그림자 밟기>에서는 그런 존재로 15년 전에 이미 죽은 쌍동이 동생이 나옵니다. 탁월한 수재로
법조인을 꿈꾸던 마카베 슈이치는 동생의 일탈로 우울증을 앓게된 어머니가 방화 및 분신 자살을 꾀하는 바람에 동생과 어머니, 심지어 둘을 구하려던
아버지까지 함께 잃게 된 후 방황의 길을 걷습니다. 동생의 일탈이었던 좀도둑질을 자신이 하게 되는데요. 절대 잡히지 않아 철벽 미카베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의 머리속에는 동생인 게이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화재사건 이후 게이지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태내에서 함께 살아가며 하나였던
존재인 형에게 붙어있는 모양입니다. 형은 그렇게 죽은 동생의 목소리와 대화를 하며 일상을 한밤중에 침입해 현금만을 털어가는 도둑으로 살아가는데,
어느 날 침입한 이니무라 부부의집에서 강도의 누명을 쓰고 체포, 복역하게 됩니다. 2년 후 출소한 그는 그 때의 사건을 찾아 조사합니다. 분명,
아내가 남편을 죽이려 하던 현장에 자신이 들이닥쳤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또 하나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이
여자, 이니무라는 팜므파탈인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명적인 매력의 여자.
<그림자 밟기>는 피카레스크 소설 (악당이나 악한이 주인공인 소설, 혹은 연작
단편)입니다. 솔직히 자수하자면, 피카레스크라는 용어를 이 책의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뭐.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요.
아무튼 도둑이 주인공이면서 연작 단편이니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좋을 피카레스크 소설인 그림자 밟기는 기존의 경찰이나 검시관이 주인공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과는 조금 달라서 실망한 분들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저는 <64> 같은 소설을 읽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 소설쪽이 오히려
잘 맞았습니다. 다만, 출소 직후의 첫 번째 사건은 제가 피곤해서 그런건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읽을수록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었고, 처음의 될대로 되라지..하는 자세로 살아가던 마카베가 뒤로 갈 수록 점점 덜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 역시
피카레스크의 전형인가 봅니다 -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도 쏠쏠했습니다. 심지어 어린 소녀에게 산타가 되어주는 '사도'편에선 코 끝이 찡해왔습니다.
미카베 슈이치에게 있어서의 그림자 밟기란, 도시의 어두움을 밟으며 살아가는 초라한 모습이기도
했고, 그 자신 내면의 어두움과 함께 가는 것이기도 했으며, 자신 안에 살아가고 있는 동생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 동생은
자신의 내면의 외침이었을까요, 아니면 진짜 동생의 영혼이 함께 있었던 것일까요? 어느 쪽이라도 어두움을 떨쳐 낼 수 있는 것은 슈이치. 그 자신
뿐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