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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교전 세트 - 전2권 ㅣ 악의 교전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미치겠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아니 읽고 있지 않을 때에도, 다 읽고 난 지금도. 모리타트의 선율이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아니, 아예 콧소리로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하스미의 마력에, 저주에 빠져버린 걸까요.
사이코패스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의미합니다. <악의 교전>에 나오는 하스미는 눈에 띄는 괴상한 얼굴, 온몸에 기름과 피를 뒤집어쓴 형상의 살인마가 아니라 잘생긴 외모와 품위 있는 행동으로,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만한 그런 인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는 차가운 인물이지요. 그의 지적인 모습은 연기입니다. 현대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지만 <악의 교전>에서 하스미를 겪고 나면 웬만한 사람들은 천사로 보일 지경입니다. 하스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거나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면 가까운 사람, 친구(애초에 그런게 존재하긴 하는 건지), 심지어 부모까지도 살해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죄책감이라는 게 뭔지도 모를 그는 완벽하게 살인 사실을 감추며 살아왔지만 유달리 감이 좋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요. 누군가가 자신의 올바르고 멋진 모습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면 그 사람 역시 사신의 곁으로 보내버립니다.
한 학교의 영어 선생으로 근무하면서 선생님들의 신뢰를 받고 학생들의 사랑을 받던 하스미에게 신뢰와 사랑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당연히 가져야 할 것들이었기에, 어느샌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자신의 가면을 땜질하기 위해 주변의 방해되는 인물들을 하나씩 처치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기에 그는 결국 폭주합니다.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기로 결심하지요.
실제로 긴박하고 침이 마르는 장면들은 교내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살육장면들이었는데,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인마를 피하려하지만, 결국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학교에서의 살육장면은 전체 분량의 1/4도 되지 않는데 동시각대에 벌어지는 일들이 묘사되어 긴장을 고조시킵니다. 단연 최고의 부분이지요.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실제 공포감은 하스미의 어린시절까지 포함하여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만들어집니다.
사실 책보다 영화로 먼저 <악의 교전>을 접했는데요. 영화는 음울하고 기괴한데 ..... 졸렸습니다. 푸욱 가라앉아 사건의 당일까지 이어지는 필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가위눌림에서 풀려나려고 애쓰는 정도의 긴장과 공포감. 그렇다고 지루해서 잠이 들것 같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쩐지 몽롱하면서 꿈과 생시를 오가는 것 같은 연출이었습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분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영화가 느린 재즈 속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가 활개를 치는 것 같았다면, 소설에서는 밝은 세상속에 세상의 어둠을 모조리 뭉쳐 안에다 담고 겉으로는 잘생긴 선생님을 연기하는 악마가 존재했습니다. 자신이 악하다는 것 조차 인식하지 않는 그는, 선생님이라는 겉옷을 벗으면 연쇄 살인마로 돌변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소설에는 참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가타기리라는 여학생인데요.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감이 좋습니다. 어쩐지 기분나쁜 4인방 선생님을 꼽았는데, 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소설의 진행상 그녀의 역할은 뛰어나게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극을 끌어가는 중요한 인물이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곳에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매력까지 갖추고 있던 소녀였는데, 어째서 영화에서는 그녀를 빼버렸을까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를 본 누리꾼들 중 몇명이 원작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운 영화라고 평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일까하는 의심이 들었지요. 영화를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느꼈었으니까요. 악몽 가운데 들어 앉은 기분이었습니다. 전반의 지루함은 견딜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대단하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원작을 읽고나니 영화가 원작을 살리지 못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시 시간의 제약이란 지면의 제약보다 큰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