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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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잠시 다단계라는 것에 발을 적신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은 블록체로 충격 고백이라는 말머리를 달면 좋겠네...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런 상상을 하는 것마저 부끄럽습니다.

지인과 또 그 지인의 소개로 설명회라는 곳에 참여해 이런저런 강연을 듣고 미팅을 한 결과.. 저는 그 모임, 혹은 그 사업에 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저는 어렵게 들어간 대학원을 휴학 중이었으므로 돈을 빨리 벌어서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제품도 그럴싸했고요. 거금을 들여 가입했는데, 마침 회원이 되는 금액을 파격 할인 중이어서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단계란 하위 회원을 모집해 그들에게 구매하도록 해야 하는데, 저에겐 그런 배짱은 없었지 뭡니까. 말로는 너도 좋고 나도 좋고라고는 하지만 내심 '내가 더 좋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찔리는 구석이라고 하지요. 저는 한 참의 시간을 들여 친구 둘과 아는 오빠 하나를 데려갔습니다. 오빠에게는 욕을 먹었고, 친구 하나는 거절, 하나는 한 달 동안 함께 다니다가 실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매하지 않았으므로 금전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시간 면에서 손해를 보았고, 특히 한 달 동안 저와 함께 그곳에 다녀준 친구에겐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실망마저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절친을 잃었지만, 여전히 자석요는 남아있습니다.
다단계라는 걸 잠시 겪어보고 나서는 어떤 포장지로 둘러싼다 해도 다단계는 다단계일 뿐이고, 반드시 잡아야만 할 기회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내가 잡을 수 있는 다른 멀쩡한 기회를 날려버리는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렸을 때 겪었으니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진 돈이 별로 없으니 잃을 돈도 적었고, 인맥이 허술하니 저로 인해 피해를 입을 사람도 적었으니까요. 만약 다단계라는 것을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금 혹은 노년에 같은 일을 겪는다면 더 깊이 빠져들어 무엇이라도 잡아보겠다며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궂이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싶었던 제 치부를 드러낸 건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때문이었습니다. 회개하는 심정이 되어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이야기를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소설 속의 다른 인물도 아닌 사카모토라는 청년에서 저를 보았거든요. 저는 그 청년처럼 과격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소설의 처음엔 그렇습니다. 스기우라를 포함한 몇 사람이 버스 인질극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범인인 노인이 어떻게든 차후에 피해 보상금을 전달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경찰이 버스 내로 진입하자 노인은 자살해버립니다. 당시 노인의 인질이었던 사람들은 묘하게 노인에게 동조하는 분위기였는데, 적극적인 공범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이 할아버지를 친근하게 여기게 되었지요. 이는 돈 때문만도 아니었고, 스톡홀름 증후군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고 있는 저조차 노인을 이해하려 했고 그의 사연이 궁금했으니까요. 노인의 언변이 좋아서였는지, 미미 여사의 필력이 좋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인의 죽음은 참 안타까웠습니다. 노인이 약속한 배상금은 그 액수가 어찌 되었든 정말로 인질들과 버스 기사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그 돈을 쓰지도, 신고하지도 못한 채 어떤 돈인가를 조사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 주축엔 스기우라가 있었고요.
 부드럽고 살짝 우유부단한 것 같지만 할 때는 하고 할 말은 하는 오지라퍼 스기우라만 아니었어도 몰래 돈을 가지고 써 버렸을 텐데, 기초 생활 수급자 권유를 받던 노인이 사후에 보낸 돈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노인과 돈의 출처를 조사하던 스기우라는 이 노인이 어떤 형태로든 뉴스에서 화제가 되었던 다단계 사기 사건의 관련자라는 것을 눈치채고 더욱 깊이 파고듭니다.
이 책은 아마도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무척 달리 읽힐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타 다른 소설도 그러하지만, 이 책은 저처럼 다단계라는 것을 살짝 겪은 후 친구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그 소설 속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기를 당하고 속아넘어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렸는가를 느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부드럽고 다정한 남편이며 누구보다도 그 자리에서 잘 지내보려고 했던 스기우라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던 그녀가 가장 이해 못 해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놓아준다는 식으로 말하고 자신도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녀는 실제 인간이라면,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겁니다. 살아온 인생과 누리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나호코는 스기우라에게, 아버지에게 또 다른 떼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책이 워낙 두꺼워 리뷰도 짧을 수 없는데, 저의 경우엔 할 말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책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십자가 이야기도 해야 하고, 베드로 이야기도 해야 하며, 반지의 이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너무 길어지지 않을까요. 그러니 저는 이만 여기서 줄이려 합니다. 제가 다단계에 발목까지 잠겨있을 때 그 건물에는 무척 많은 - 연예인들도 있었죠 - 사람들이 있었지요. 목까지 푹 잠겨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아직도 다단계의 꿈을 꾸고 있을까요. 아니면 저처럼 부끄러워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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