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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글자들이 춤을 춘다. 나는 누구일까?
기억을 잃은 한 젊은이가 사설탐정의 도움으로 그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다가 그의 은퇴를 계기로 자신의 과거를 찾아보기로 결심합니다. 과연 단서가 있기는 한 걸까요? 2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에 그는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국적이 프랑스가 맞는가.. 그것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이름도 기억 못하는 걸요.
그는 타인의 과거찾기를 수임한 탐정처럼 자신의 과거를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단서를 잡아갑니다. 혹시 내가 그 사람은 아닐까. 이내 그 사람이 아님이 밝혀지면, 추적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허무함보다도 자신이 상상했던 것들이 바스라지는 것에대해 더욱 허무함이 느껴집니다.
나의 이름은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가 아니었다. 나는 풀이 높게 자라 있는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오직 그 끝부분에만 아직 석양빛이 깃들고 있었다. 나는 미국 할머니의 팔을 잡고 이 잔디밭을 따라 산책한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미로'에서 놀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두 개의 그네가 매어진 이 녹슨 문은 나를 위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p.95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나의 과거와 타인이 생각하는 과거는 다릅니다.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 그것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의 왜곡이 중첩되며 진실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다른 어그러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기록해두지 않은 인간의 기억이란 불확실 한 것이어서, 과거의 동창을 만나는 것이 가끔은 불안하기도합니다. 내가 왕년에 어마어마하지 않았으면 어쩌지? 내가 기억하는 부분이 있을때도 이렇게 불안한데, 전혀 기억이 없는 부분의 과거의 인연을 만나는 일은 더 그렇습니다. 길에서 친구가 알은 체를 하는데, 저는 그 친구의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거든요. 주인공인 탐정은 저보다 더 불안했을겁니다. '자신'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과거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등을 찾아가고, 그 단서로 자신이 예전에 살았다고 하는 집을 찾아가고... 그 가운데에 '페드로'라는 이름이 나타나고. 과연 페드로는 '자신'일까. 불확실하고. 함께했던 것 같은 모델이자 신비스러운 여인 '드니즈'는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일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일까.... 추적해가면 갈 수록 궁금증은 늘어만갑니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마침내 증발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창유리를 뒤덮고 있는 저 수증기, 손으로 지울 수도 없을 만큼 끈질긴 저 증기에 불과한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운전사는 도대체 어떻게 방향을 알아보는 것일까? 드니즈는 잠이 들었고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위로 기울어졌다.
p.227
소설의 분위기는 건조하면서 축축합니다. 문체는 건조하되 느껴지는 분위기는 눅눅합니다. 주인공은 사건을 자신의 일인듯 아닌듯 파헤치지만, 어쩐지 우울감이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알아가고 싶지만, 아는 것이 두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뇌 어느 곳에 깊숙히 숨어있어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기억들은 과자 상자속에, 빛바랜 사진속에, 오래된 전화번호속에 숨어 언젠가 누군가가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끄집어 내졌음에도 무언가 확실하게 이렇다 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저 그랬구나.. 그땐 그랬었지.. 하는 추억의 단편들이었을 뿐이었죠. 과연 잘 알고 지내지 않았던 동창이 찾아와 나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자신없습니다. 내 자신의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억은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그러니, 과거의 일도 소중하겠지만, 그보다는 현재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지금의 현재도 나중엔 과거가 되어버리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