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리언셀러 클럽 한국편 001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
김종일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양정모가 어느 날 건네 받은 두툼한 소설 원고 뭉치. 그것을 여는 것으로 이 기괴한 소설이 시작됩니다.

 

겉장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겉장을 넘기자. 아래와 같은 부제아래 제목만 덩그러니 중앙에 씌어 있었다.

 

김종일 장편소설

 

'몸......?'

이상하게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몸'이라는 커다란 글자 하나가 눈에 들어와 박히며 아찔한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으로 소름이 돋고 온몸의 신경세포가 잘디잘게 떨었다. 그 다음 장을 펼치니, 월트 휘트먼의 경구가 또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에 신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다.

-- 월트 휘트먼

 

그리고 그 다음 쪽에 이르러서야 소설은 시작되었다. 그랬다. 그것은 시나리오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영화감독에게 소설을 건네다니. 혹시 그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건 아닐까. 그러나 그는 분명 나에게 '영화감독'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어쩌면 나에게 자기 소설을 읽고 시나리오로 각색해 영화화 해 달라는 무언의 부탁일지도 몰랐다.

혼란으로 탁해지는 머릿속을 애써 부여잡으며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깨어날 수 없는, 헤어날 수 없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p.12~13

본격적으로 시작된 소설은 '눈', '입', '얼굴', '귀', '머리카락', '구토'. '몸', '손'이라는 신체 각부위의 - '구토'는 신체는 아니지만 체액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냥 연결 지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이야기와 링반데룽이라는 길잃기에 대한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불량학생들에게 맞다가 한쪽눈을 잃고 새로 해 넣은 눈이 본체를 조종하고 지배하여 마침내 복수를 하고 본체를 완전히 장악해 버린다는 내용의 '눈'. 남자와 룸메이트의 배신으로 식이조절장애에 걸린 여자가 흉포해지는 과정을 그린 '입'. 미녀와 추녀의 비뚤어진 정신세계가 교차하는 '얼굴'. 들리지 않는 소리에 쫓겨 공포에 사로잡히는 자들의 이야기 '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의 공포스러운 진실 '머리카락'.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퍼부어주고 싶은 욕만큼이나 치밀러 오르는 욕지기로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구토'. 신체에 대한 컴플렉스가 인터넷 중독에까지 이어져 파멸하는 '몸'. 어린아니의 장난과 객기, 그리고 친구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운 한 아이의 이야기 '손'. 조난 당한자가 여우에 홀린 듯 같은 자리를 맴돌며 자신의 죄와 마주해야했던 이야기 '링반데룽'.

 

공포, 호러에 논리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괴이한 분위기를 깎아먹는 일이겠지만, 어쩌면 그건 비과학적인 것으로 인한 공포를 과학과 논리로 밀어내려는 일종의 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옴니버스 단편들을 읽으며 제가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한편이 괴이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있다면 큰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일면 조금 아쉬웠습니다. 옴니버스 사이의 연개성도 떨어지고 차라리 단편집으로 할 것이지 어째서 장편의 형태를 취했는가. 게다가 어쩐지 이토준지의 만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뻑뻑해진 안구 땜누에 한쪽눈을 번갈아 이용해가며 읽는 동안 이 소설 속의 '소설'은 어떻게 끝은 낼 것인가 궁금했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영화감독 양정모가 읽고 있던 소설이었으니까요. 

 

양정모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저와 비슷한 평을 합니다. 이럴수가. 제가 부족하다고,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의도 된 것들이었다니. 의도인가 혹은 변명인가 궁금해 할 새도 없이 양정모의 주변에서 괴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렇다고 소설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제목 그대로 '몸'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연작이라고 하기에는 등장인물이나 이야기상에 전혀 연계성이 없었고 에피소드마다 어떤 식으로든 '소외된 등장인물'이 '사회 또는 타인'사이에서 '모종의 갈등'을 겪다 '끔찍한 자멸'을 맞는 식의 구성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었다. 인간의 신체 변형을 다룬다는 면도 일본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의 여러 작품과 유사점이 많아 독창성조차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 있었다.

 

p.337

 

원고를 덮고 나서도 불쾌한 기시감이 들었던 그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소설을 쓰레기통에 버리지만, 그것은 그의 공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옴니버스 소설의 완성은 마지막 '공포'편에 있으며 반드시 '에필로그'까지 읽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혈액이 온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듯이 이 공포와 괴이함 역시 순환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자 다행스러운 점은 이 소설의 공포감은 이 책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책 밖으로 뛰쳐나와 잠 돗 들게 하거나 화장실을 갈 수 없게 만들지도 않고 제 신체 각부위를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