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제가 함께사는 삶이라고 했네요.. 함께 사는 삶이라고 한다면 대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생각하게 되지만, 이 책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하는 함께 사는 삶이라고 한다면 더욱 광범위 한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최재천 교수라고 하면 '통섭'이지요. 통섭이라는 것은 한우물을 파는 사람이 다른 우물을 파는 사람과 두루 협력해 더 좋은 우물을 파는 그런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그런 지식이나 개념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통섭을 테마로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비단 그런것에 머무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문과 과학의 경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두루 아울러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는 멀티플레이어의 세상일테니까요.
프롤로그에서 교수는 통섭적 인생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자연의 법칙대로 사는 태도가 인간에게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만큼 자연을 지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딸의 친구가 인간이 없으면 동물들은 살기 힘들어 질거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인간이 많은 동물들을 못살게 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등학생이니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많은 어른들도 마치 인간이 생태계의 정점에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겠지요.
두번째는 피카소처럼 다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아인슈타인처럼 크게 한방이 아니라 피카소처럼 다작하다보면 단타, 홈런이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아.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다작을 하는것인가!
통섭적 인상을 살아가는 방법중 하나로 교수는 독서를 권합니다. 그러나 취미 독서가 아닌 기획 독서를 권유하지요. 잘 아는 분야나 재미로 독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분야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의 경우 경제분야나 인문분야가 되겠네요. 경제관련 책은 몇줄만 읽어도 울렁거리고 호흡이 가빠지는데.. 그래도 읽다보면 언젠간 이해가 되니까... 읽어볼까.. 어쩌지.. 하고 있을 때 교수의 말이 힘이 되었습니다. 인문학자가 과학서적을 읽는 것이 과학자가 인문서적을 읽는것 보다 어렵다는 말인데요. 저는 과학자가 아니므로 인문서적을 읽는게 조금 더 쉬울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힘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볼 때, 두루 살피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주변을 아우르는 삶을 100세까지 이어나가기 위한 방향 제시를 위한 아주 좋은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은이가 분명 최재천이라고 되어있는데, 책을 읽다보면 교수의 말을 누군가가 인용하거나 전달하는 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최재천 교수는~"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자가 따로 있다는 것인데 책을 아무리 이리저리 뒤집고 엎어보아도 알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있다면, [최재천 지음]이라고 하면 안되는 아닐까요? [최재천,ㅇㅇㅇ공저]이렇게 되어있어야 하는거 같은데요.. 프롤로그는 분명 최재천 교수가 쓴 것 같던데, 어째서인지 본문의 내용중 최재천 교수의 말은 모두 큰 따옴표 안에 있었습니다.
흐음.. 본문에 집중해야하는데, 이런 것에 신경쓰이는 .. 저는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