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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ㅣ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평점 :
학생 때, 심심하면 사전을 열어보곤 했습니다. 국어사전은 집에서 사주지도 않았는데, 영어사전은 엘리트 영한 사전 뿐만이 아니라.. 어디거였더라.. 영영 사전도 있었고, 불한사전(이건 몇 번 열어보지 않았습니다.)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사전이라는 것이 신기한 물건이라, 하얗던 옆면이 새카매질 무렵이면 어쩐지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은 기분이라 뿌듯해지기도 했습니다. 단지 손을 안 씻고 사전을 뒤져서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요사이 전자사전, 혹은 스마트폰 세대는 느끼지 못했던 손맛이 있었습니다. 웹서핑을 할때도 종종하게 되는 짓이긴한데요. 단어에 단어 꼬리 물기. 한 단어를 찾으면, 그 단어를 설명해 놓은 또 다른 단어를 찾곤 하는 것은 저만의 일이 아닌가 봅니다. <배를 엮다>라는 책에서도 그런 대목들이 나오거든요.
사전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뿌듯한 일인데, 사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보통일이 아닌가 봅니다. 여러사람의 노고와, 헌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일생의 투자가 필요한 걸 보면요. 출판사 입장에서도 사전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명예 이상의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지난달 제주책축제때 헌책과 새책 교환하는 마당에 어떤 분이 동아 대백과 사전 , 그러니까 여러권으로 된 것을 가지고 오셨던 모양입니다. 우리 어릴적이라면 웬만한 집에 한질씩 있던 그런 백과사전인데... 이 백과사전이 도통 교환되어 나가지 않더란말입니다. 무료로 책을 얻어가는 시간에도 그냥 자리만 지키더군요. 뒷방 늙은이 신세였습니다. 이해는 되지요. 그렇게 사전을 뒤적이기엔 너무나 편리하고 스피디한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하지만 어쩐지 쓸쓸해지더군요.
<배를 엮다>라는 책에서는 '대도해'라는 사전 편찬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과 인생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찌보면 고지식해보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대단해보이는 사람들. 그들이 만들고 있는 사전의 이름은 어째서 '대도해(大渡海)'일까요?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아라키는 혼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
- p.36
이 구절로 인해 저는 이 책에 사로잡혀버렸습니다.
아.. 그래서 제목이 배를 엮다로구나.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남에게 완전히 내 생각과 같도록 전달 할 수 있는 수단이란 언어일겁니다. 그 수많은 언어들과 그 언어의 기록.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요.
종이사전의 얇으면서도 보들보들한 매력은 떨쳐버릴 수 없는 강한 유혹이겠지요. 디지털에선 느낄수 없는 그런 매력이 있습니다. 이 소설속의 인물들 역시 그 매력에 빠져 거대한 방주를 - 인고의 세월속에서 지어나갑니다. 하지만, 즐거워서 하는 일이기에 조용히 기뻐하며 나아갑니다. 저와 함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