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무덤
마자린 팽조 지음, 함유선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9년 의 아이를 살해한 죄로 교도소에 수감중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나만의 공간에 유기하였지요. 아마도 사람들은 를 끔찍하게 여길겁니다. 언제나 올바르고, 정돈되어있으며 멋진 남편은 를 비난하겠지요. 의 어머니도 나를 다시는 만나주지 않을테구요. 아이들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습니다.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져있거든요. 하지만, 는 희망합니다. 소중한 의 아들들을 혹시나 남편이 데리고 면회와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말이지요. 에게 벌을 줍니다. 먹지 않는 벌. 하지만, 아침 식사를 기다립니다. 그 아침식사를 먹지 않는 그 기분을 즐기거든요. , 나의 몸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즐깁니다. 그리고 남편은 나를 조롱하는 것을 즐깁니다. 는 의 몸안에 있는 것을 온전히 혼자서만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홉달 동안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그 아이를 온전히 사랑했지요. 하지만, 이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엄마라는 말보다 아빠라는 말을 먼저 가르쳐야하는데, 그게 얼마나 힘든지. 이 아이는 아파서도 안됩니다. 게다가 남편이 집에 있을때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남편은 시끄러운 걸 싫어하니까요.  아, 태어 난 후부터는 이 아이가 의 아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를 만의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아이를 사랑과 행복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하고 싶었거든요. 어렸을 때 마당 곳곳에 인형을 묻어두었던 것처럼. 아이를 혼자 몰래 낳고, 만의 공간에 묻어두었습니다. 베란다에 있는 냉장고에요.

 

 

이 소설의 시점은 '나'입니다.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서래마을 영아 사건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그 때 그 사건이 자꾸만 떠오르는데, 책 말미에 옮긴이의 이야기에도 그 이야기가 있더군요. 영아 살해, 냉장고에 시신유기.. 이 두가지 코드만이 비슷하고 사실은 다른이야기다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관련이 없는걸까..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임신중에 아버지에게 버려진 어머니에게서 키워졌습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음울하고, 잔인하고, 괴기스럽습니다. 공포소설은 아닌데, 어쩐지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무섭습니다. 어린시절에 바비인형을 고문하고, 땅에 묻어버렸던 주인공의 행동들은 어쩌면 어머니의 인형처럼 자라던 자신을 바비인형에 투영하고, 자신을 고문하듯이 인형을 고문하고 장례를 치른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는 프랑스 전 대통령 미테랑의 숨겨진 딸입니다. 어쩐지 주인공과 처한 상황이 비슷하네요.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부유했지만,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어린시절의 실제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층 더 우울해졌습니다.

 

소설속에서는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고리를 볼 수 있습니다. 사디스트인 남편을 두려워하는 주인공. 마조히스트인 주인공을 두려워하는 남편. 남편의 두려움은 고스란히 새디즘으로 나타나고, 주인공은 그것을 자신이 못난 탓이라며 내면에서부터 자신을 학대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면도 보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두렵습니다. 영아 살해라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이해하게 되어 영아 살해마저 용서하게 되기에 이르니까요. 위험한 소설입니다. 그러나 그러니까 영아 살해를 한 사람을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아닙니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은 우리와 다른 기준을 가졌던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우울합니다. 남편에게 쓰는 편지형식으로 되어있는데, 제가 남편이라면 읽지 않고 찢어버리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이 아니므로,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고, 비난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다시 비난했습니다. 이해되지만 이해해서는 안되는 여자. 그녀가 이 소설의 주인공,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