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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어쩐지 저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라기 보다는 에세이스트로 더 다가옵니다. 물론, 본인께서는 부정하겠지요. 어디까지나 소설가가 본업이고, 에세이는 부업이라기는 뭣하지만, 어쨌든 부수적인 일이다라고 하실테지요. 뭐 그거나 그거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렉싱턴의 유령, 테엽감는 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너무길어!),1Q84,해변의 카프카 등등.. 제목만 꿰고 있습니다. 섣불리 다가서기 어려운 기운이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제 스스로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움찔거리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혹시나 너무나도 내면을 후벼파서 꼭꼭 감추어두었던 나의 어떤 것들이 파헤쳐질까봐 두려워서일까요. 그냥 단순히 게으른 탓일겝니다.
어쨌거나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좋습니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서 싫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지만, 그냥 그렇습니다.
이번의 <저녁무렵에 면도하기>는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입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보다도 먼저 나온 책인데, 예전에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을 때에도 전 읽지 않았지요. 올해 <저녁무렵에 면도하기>란 제목으로 출판된 후에야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역시. 좋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먼저 읽은 샐러드사자나 채소바다표범보다 좋았습니다.
글이 좀 더 젊고, 활기찬데다가 위트도 있었으니까요. 그 전에 읽은 두 편의 무라카미 라디오가 그냥 이웃집의 친근한 나이든 아저씨의 글 처럼 느껴졌다면, 이번의 책은 친근한 작가님의 유쾌한 이야기처럼 여겨져서 조금 더 동경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읽다가 사과향이 그리워지기도하고, 갓 튀겨낸 감자 크로켓이 땡기기도하고 - 정말로 감자를 사러 갈 뻔 했습니다 - 도너츠도 먹고 싶고, 치라시 초밥 도시락을 싸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가을에 읽기엔 위험한 책입니다. 본인은 마라톤을 즐기니 고칼로리 음식을 드시고 달리면 그만이겠지만, 저의 경우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위험할 수 밖에요.
그렇다고 푸드 에세이는 아닙니다. 제가 배고팠던 탓인지. 아니면 가을이라 그런지, 아니면 연일 내리는 비에 무언가 허전해서 고칼로리 음식이 땡길때 마침 이 책을 집어 들었기 때문인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결코 푸드 에세이집은 아닙니다. 다만, 음식이야기가 포함되어있었을 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음식은 빼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니까요.
그런데. 푸드 에세이는 아니라고, ... 분명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러고보니 음식이야기가 무지 많군요. 처음부터 리스토란테(이탈리안 레스토랑)이야기, 장어, 스키야키(!!! 아 스키야키), 기내 서비스 중 블러디메리, 식당차.... 이러니 책 읽는 내내 배고플 수 밖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음을 단단히 다 잡고 읽을 걸 그랬습니다.
꼬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