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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번역합니다 - 고독해서 즐거운 번역가의 일
이진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10월
평점 :
좋은 글은 억지로 음미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다르는 것 같아요.
<아직도 번역합니다>는 이진 번역가의 첫 에세이인데요,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 내려간 글을 읽으며, 왜 이 분이 번역한 글을 읽으면 편안했는지 알겠더라고요.
고개만 들면 바로 보이는 위치에 이진 번역가가 옮긴 <나는 내가 고장 난 줄 알았다>가 꽂혀있기에, 더욱 반가운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났거든요.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이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랜 세월 외국어로 된 원고를 수없이 번역하고 만지고 표현을 고치며 다루었던 베테랑이라 그런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써 내려간 문장들은 물 흐르듯 가슴속으로 파고 들었어요.
탁월한 문장력 덕분에,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어떤 턱도 걸림도 없이 편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지만, 때때로 마음이 울리는 탓에 잠시 페이지를 닫고 생각에 머무르기도 했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참 글을 잘 쓰는 분이로구나" 싶었고요, 덕분에 그분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가 잠시 동행할 수 있었어요.
한 분야에서 한 우물을 오랫동안 파는 걸 잘 못하는 터라, '30년 차 번역가'라는 타이틀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심이 들었어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한 가지 유행이 두 달을 넘기기 힘든 세상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정성을 들여 자신의 일을 한다는 건 보통이 아니잖아요.
<아직도 번역합니다 >에서 만난 저자의 일상은 고독하기는 하지만 결코 쓸쓸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조금 알 것 같았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죠.
저자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잖아요. 텅 빈 고독이 아닌 활자와 페이지로 채워진- 밀도 높은 고독의 한가운데에서 에너지를 충전한다니... 일종의 히키코모리 비슷한 삶을 사는 제가 왜 서럽고 쓸쓸하지 않았는지 깨달았어요.
저자는 문장과 흐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를 찾으려고 밤낮없이 고민하고, 우리말에 없는 표현을 어떻게 제대로 표현해낼까 꾸준히 고민해 왔어요. 원문의 모호함이나 인물의 감정 등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었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고 늘 행복하고 편한 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30년간 이어나간 사람의 아우라.
그걸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답니다.
<아직도 번역합니다>의 초반에는 번역가라는 직업인으로서 다루는 '번역'과 문장에 대한 철학, 일상의 루틴을 볼 수 있었고요, 중반부터는 저자의 개인적이고 솔직한 내면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어요.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독자를 한층 더 따뜻하고 밀도 높은 개인의 공간으로 끌어당긴 셈이죠.
저자의 아버지가 대한민국 광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전설적인 카피라이터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우리의 날개 대한항공"처럼 머릿속에 콕 박혀있는 명카피들을 만드신 분이 아버지셨다니!
언어를 다루는 탁월한 감각이 부녀 사이에 흐르고 있음을 감탄한 것도 잠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의 이야기를 담아낸 페이지에서는 저도 모르게 코 끝이 시큰해졌어요. 짧은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나보낸 이의 이야기가 아프도록 아름다워서 가슴이 미어지기도 하더군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마치 이진이라는 한 사람의 깊은 인생의 일부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번역가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혼자만의 고독 그리고 열정과 따뜻함이 있는 인간 이진의 삶을 다정하게 나누어 받은 느낌이었거든요.
일상에서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분이라면 <아직도 번역합니다>에 잠시 머물러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