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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약 수첩 ㅣ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시부사와 다쓰히코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7월
평점 :
집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의 가로수는 협죽도(Nerium oleander L)라는 나무였습니다. 원래 화단에 들어가지도 않고 나무나 꽃을 꺾는 타입의 어린이가 아니었던 저는 매일 그 나무 근처에서 놀았습니다. 매일 보는 상록수, 발그레한 예쁜 꽃이 피는 나무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평범해 보이던 나무에 숨겨진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일명 유도화(복숭아꽃을 닮았다 하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사실 엄청난 독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이 피크닉을 즐기다가 김밥 먹을 나무젓가락이 없던 차에 복숭아 나뭇가지를 꺾어 젓가락을 삼고 그리고 중독되어 죽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그 나무는 복숭아가 아니라 협죽도였음에도 몰랐던 거죠. 협죽도는 제주에 흔한 가로수입니다.
잎과 줄기, 뿌리, 열매에는 올레안더라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습니다. 치사량은 0.5mg/kg으로 어린이라면 진액을 조금 빨아먹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독나무 아래에서 자라났으며 함께 살아갔습니다. 혹시라도 제주 여행 중에 협죽도를 만나면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쨌든 매일 일상을 같이하던 나무에 독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안 후로 '독'이란 무엇일까 궁금해했습니다.
물론 당시 쥐를 잡기 위해 놓았던 약들도 많았지만 누가 보아도 먹으면 죽는다! 고 경고하는 해골 모양이 그려져있는 그런 것 말고,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독에는 어떤 게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섭렵했던 다양한 고전 추리소설 속에도 독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독뱀을 사용하기도 하고 뚜껑이 열리는 반지 속에 숨기기도 했습니다. 어떤 만화에서는 달콤한 키스가 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요, 백설공주를 죽인 것도 독사과였습니다.
불안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자라나면서 일종의 화합물이며...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내 안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올바른 인식일 겁니다. 그런데 독을 자유롭게 다루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사용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도구로서 활용했던 겁니다.
시부사와 다쓰히코의 <독약 수첩>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 혹은 개인의 일대기에 등장하는 스토리를 모았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한 소재들이 가득 들어있는 탐스러운 열매입니다. 시부사와 수첩 시리즈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만,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참, 혹시나 하여 덧붙이지만, 독에 관한 화학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이용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모여있습니다.
전설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독살 사건은 수도 니네비를 건설한 아시리아 왕 니누스가 자신의 아내인 세라미스에게 살해당한 사건일 것이다(기원전 2세기).
-p.15
예전부터 독은 여성이 많이 이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타인을 해하거나 자신을 죽일 때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죽은 다음에도 피를 많이 쏟은 괴상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라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고통을 수반하며 생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독을 사용한 살인 중 무려 70%가 여성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다. 남성들은 보통 이런 죽음의 절차에 좀처럼 유혹되지 않으며, 아무리 적일지라도 독의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유명한 독살범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p.11
남성에 의한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거나 어쩌면 저 말이 정답일지도 모릅니다. 독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진행 속도도 다르고 결괏값이 다르기 때문에 본인의 알리바리를 조작하는데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성독살범에 관련된 내용은 대부분 재산이나 애정 혹은 불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녀에게 독을 건네준 인물들은 남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래 독약 범죄는 대부분 여성이 독점하고 있다는 통설이 있다.(중략) 그러나 언제나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최근의 정신분석학 성과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선천적인 독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인간 중에는 오히려 남성이 많다고 한다. 그들은 매사에 침착하고 과감했으며, 냉혹하고 잔인하기까지 했다.
-p.187
그러므로 독을 많이 사용한 건 여성이니 남성이니 나눌 필요가 없다는 걸 <독약 수첩>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단지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였던 가 하는데 문제기 있었던 것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사건 속으로 들어가 독 이야기를 하며 흥미로운 스토리를 전개합니다.
초기에 등장한 독이 있는 약초는 점점 정제된 형태를 취해 다루기 쉬운 비소, 스트리키닌으로 진화해갑니다. 20세기에는 니코틴까지 등장합니다.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다양한 형태의 독성 물질이 나타났습니다. 이후, 눈부신 발전을 한 21세기의 우리는 다양한 독성 물질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진보가 가져다준 이런 참혹한 대가는 요컨대 근대 문명이 우리의 생활 속에 뿌려놓은 유해 물질과 연관이 있다. 무지한 아이들이나 경솔한 어른들이 이런 유해 물질들을 흡입할 위험성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는 셈이다.
-p.214
저자가 말하는 위해 물질이란,
첫 번째, 의약품과 최면제, 진정제
두 번째, 불필요한 식품 첨가물(인공착색제, 방부제 등)
세 번째, 부엌용 세제, 산, 금속연마액 등
네 번째, 농약, 살충제 등.
시부사와 다쓰히코의 이런 관점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장단점이 있기에) 과거보다 더 많은 독성물질에 노출되고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중세나 근대에 비해서 마음이 놓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될지 두려움에 떨지는 않습니다. 늘 그래왔듯 우리는 결국 방법을 찾을 테니까요.
시부사와 다쓰히코의 <독약 수첩>은 독과 독을 이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놓인 인문서적입니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읽으며 독약의 문화사를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신간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