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
에이미 하먼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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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에 서부 개척시대, 오리건 트레일, 아메리카 선주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하면 그렇게 반가운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함께 춤을 정도가 괜찮았지 싶은데요, 그 외의 다른 영화들에서는 원치 않는 장면이 많이 등장했기에 그리 달갑지 않았습니다.



백인의 시각에서 본 아메리카 선주민과의 충돌이 대부분이었기에 늘 (당시 표현으로) 인디언은 살육의 주체이며 머릿 가죽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미개한 인종이었습니다. 기병대는 정의의 편으로 그런 약탈자들로부터 주민을 지키는 훌륭한 사람들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어린 저는 그런 것들에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누가, 누구의 약탈자인지...



그런 면에서 <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은 약탈자들 사이의 이야기도 아니고 억지로 꿰어 맞춘 평화와 화합, 통합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좋았습니다. 희망을 찾아 떠나는 마차 행렬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대로 담았습니다. 책 소개에서는 자기 조상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된 이야기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남편의 조상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남편은 주인공들의 5대 후손으로 여전히 그 안에는 역사가 숨 쉬고 있었습니다. 소설 속에 그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굉장한 스토리 속에서 어쩌면 이들의 품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았었겠나 하는 상상을 합니다. 존과 나오미가 겪는 삶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생존 그 자체였기에 후손의 존재가 더욱 크게만 느껴집니다.



소설의 도입에서 나오미와 가족들은 포카텔로가 이끄는 쇼쇼니 족의 습격을 받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이 살해당하고 자신은 아직 갓난 아기인 막냇동생과 함께 끌려갑니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존을 처음 만나던 때로 돌아가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이 장치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면서도 좋았습니다. 소설의 삼분의 이 지점까지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르게 되었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은 나오미가 포니 족과 백인 혼혈인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토리의 흐름이 좋았습니다.



죽은 남편의 가족과 친정 식구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리건 트레일을 따라서 희망을 갖고 캘리포니아로 이동하면서 존 라우리와 동행하게 된 걸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포니 족과 백인 어느 쪽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양쪽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살고 있던 존은 처음부터 나오미에게 빠졌습니다.



폭풍처럼 밀려온 사랑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참 좋았습니다. <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은 황야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사랑이나 오아시스 같은 행복만을 풀어내지 않았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환경, 상상치도 못할만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여정이었기에 늘 불안함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콜레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슬픔이 치유되기도 전에 또 다른 가족이나 이웃을 잃기도 하며 그들은 끊임없이 전진해야만 했습니다. 물을 구하지 못해서 탈수가 오기도 하고 마차 바퀴가 부서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몇 날 며칠을 아끼고 또 아끼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고 그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환경적으로 좋지 않은 탓에 또 어린아이들을 잃기도 했습니다. 나오미는 갓 태어난 막냇동생을 존과 함께 울프라고 이름 짓고 부쩍 수척해진 엄마 대신에 돌보기도 합니다. 막냇동생이긴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아이처럼 여겼습니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나오미는 그림을 무척 잘 그립니다. 백인들에게 호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위기의 순간 아메리카 선주민과의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힘들 때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를 잃은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노새와 당나귀, 종마를 다루는 기술자이면서 마음이 강한 남자 존은 그런 그녀에게 자꾸만 끌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혼혈인 탓에 앞으로 나오미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자꾸만 걱정되어 쉽게 청혼하지 못합니다. 오해와 갈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작은 결혼식도 올립니다.



존 라우리와 나오미 메이 라우리의 마차를 구입하기 위해 존이 나오미의 동생과 함께 잠시 대열에서 벗어났던 그 며칠 사이 프롤로그에서 보여주었던 그 비극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존은 나오미를 찾겠노라고 그녀의 동생들과 굳은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새로운 국면을 마주합니다.



그들의 여정과 삶을 보고 있는 것만 해도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스릴러나 미스터리를 읽는 것보다도 초조했으며 위기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건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힘들다고 말하지만 저들의 삶에 비하면 너무나 나약한 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였습니다.



1850년대 오리건 트레일을 배경으로 한 서사시라는 타이틀 때문에 읽었던 역사 소설이지만, 저에게는 그보다 더 큰 매력, 교훈 그리고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이제는 길 잃지 않은 자들이 되었음에 안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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