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라이터
앨러산드라 토레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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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도 말했지만 추천사가 요란하다거나 평점을 강조한 책은 기대감을 약간 내려놓고 읽는 편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경우를 많이 봐 왔기 때문이죠. 그러나 엘러산드라 토레의 <고스트 라이터>는 기대를 잔뜩 안고 보아도 좋습니다. 다만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하는 조바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말이죠.



최근 유튜브 영상물의 경향을 보면, 아 물론 다른 책에서 인용해오는 부분이긴 한데 - 기승전결이 아니라 결결결결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소설 역시 전전전결인 것 같습니다. 분명 주인공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지르긴 했는데 그걸 좀처럼 독자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뒤쪽부터 다녀오는 건 미스터리 스릴러 마니아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저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결국 나는 주인공 헬레나 로스의 대필 작가인 마크 포춘이 되어 그녀와 함께 합니다. 처음에는 독자로 시작했지만 점점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녀의 주변 인물이 되는 기분은 참 묘했습니다.



책을 손에 들고 읽어내려가는 동안 왼 손가락 끝에 아로새겨진 활자가 느껴졌습니다. 그 감각 덕분에 <고스트 라이터>라는 소설을 읽고 있는 현실감각을 느끼며 한적하면서도 예쁜 카페에 앉아있는 나는 독자라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숨겨두었던 그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이야기 - 그것을 읽는 독자로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한 남편에 완벽한 딸을 가졌던 완벽한 작가였던 그녀는 어째서 남편과 딸을 잃고 혼자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 미스터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궁금했습니다.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오르고 출판사와 담당자까지 막대한 부를 안겨줄 만큼 인생의 탄탄대로를 달려왔지만 결국 외롭게 죽어가게 된 건 누구의 탓인지도 궁금했습니다.



인생의 막바지에 밝혀야만 하는 그녀 자신의 이야기란 무엇이며 어떤 전개를 갖게 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강박적으로 규칙을 정하고 누구든 그걸 어기면 발작적으로 굴었던 헬레나 로스는 생의 말기에 되어서도 그 규칙을 놓지 않습니다. 혼자서 한 사람의 몫을 하기도 버거운 순간에야 드디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데뷔 때부터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케이트는 을의 입장이었지만 절필을 선언한 헬레나를 찾아간 순간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수다스럽고 참견쟁이 친구가 됩니다. 요리사나 가사도우미를 구하길 적극 권하는 사랑스러운 친구가 됩니다.



헬레나는 마지막으로 집필하고 싶은 책이 있지만 그걸 완성하기 전에 죽을까 봐 대필 작가를 원했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데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막말을 해대는 메일을 보냈던 작가. 섹시함을 무기로 로맨스 소설 베스트 작가인 그녀, 마르카 반틀리에게 자신의 고스트 라이터가 되어달라고 합니다.



당연히 거절하리라 생각했는데 금발 미녀 마르카 반틀리는 대리인을 통해 계약하기는커녕 집으로 당당하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세상에... 구깃구깃한 옷을 입고 트럭을 타고 나타난 이 남자가 마르카 반틀리라니! 창의적인 이야기꾼인데다가 필력도 좋은 마크 포춘은 진짜 자신의 책이 잘 팔리지 않자 마르카 반틀리로서 활약해 왔던 겁니다.



여기에도 안타까운 사연이 있지만, 어쨌든 그는 평소 농장을 운영하며 소를 키우며 소설을 쓰는 중년 남자였던 겁니다. 헬레나와는 좋으려야 좋을 수 없는 사이지만 죽음에 가까워가는 모습을 보고 적극 돕기로 합니다. 그래요. 이 책 속의 책은 헬레나가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과거에 대한 속죄이자 아픔의 고백이며 제가 읽은 <고스트 라이터>는 마크와의 우정 이야기입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은 좋아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아팠습니다. 마침내 헬레나 로스의 이야기가 모두 쏟아져 나왔을 때 마음이 찡 울리는 걸 느꼈습니다. 너무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전, 엄마니까요. 헬레나의 엄마도 그리고 그녀 자신도 좋은 엄마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딸을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스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헬레나 로스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 내용이 모두 진실인지, 마지막에 이르러 모래 몇 알만한 의혹을 남깁니다. 처음에는 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하며 받아들였다가도 책을 덮은 후에는 아니, 그게 아니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그러한지 알려주지 않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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