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심장 스토리콜렉터 100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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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장 - 크리스 카터 - 잔인한 스토리텔링에 사로잡히다


크리스 카터라는 다소 생소한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났습니다. 제프리 디버와 견줄만하다거나 여기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는 한니발 렉터와 비견할만하다는 식의 미사여구들이 있길래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추천사라거나 홍보문구 비슷한 게 잔뜩 붙은 책 치고 그만한 모양새를 보여주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책 <악의 심장>은 찐이었습니다.


<양들의 침묵>에서는 열의는 있지만 아직은 미숙한 FBI 새내기 스탈링과 대화만으로도 옆방 수감자를 죽게 만들 수 있을 만큼의 놀라운 능력을 지닌 한니발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진심을 다해서 상대방을 파헤치고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위치로 데리고 올 수 있을만한 두 남자가 등장하여 팽팽한 맞대결을 보여줍니다. 스탠퍼드 출신이며 천재인 그들은 한자리에서 같은 곳을 보며 전진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 사람은 경찰로 다른 한 사람은 연쇄 살인마로서 자리합니다.



우연히 일어난 교통사고로 인해 트렁크에 숨겨져 있던 아이스박스. 그 안에 들어있던 두 여성의 잘린 머리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결같은 자세로 묵비권만을 행사하던 용의자는 마침내 LA 경찰인 로버트 헌터에게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하와이로 휴가를 가려다 말고 호출당합니다.



그리고 로버트 헌터는 자신의 대학 때 친구이자 약간 보호자 같았던 루시엔 폴터를 취조실에서 만나게 됩니다. 루시엔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며 내용물을 모른 채 배달을 하던 중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를 믿고 싶었던 헌터는 그가 알려준 집으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본 것은 끔찍한 살인의 트로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자신들과 함께 친밀감을 유지했던 동창 수잔의 문신 피부 액자가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비로소 헌터는 루시엔에게 농락당했음을 알고 다시 그를 만납니다. 일반적인 시리얼킬러가 비슷한 내용의 전리품을 보관하는 것과는 달리 시기에 따라 그랬던 건지 아니면 취향에 맞춘 것인지 몰라도 다양한 시신의 조각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파악된 것만으로 33명의 희생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로버트 헌터와 FBI는 각 조각의 신원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루시엔이 제안하는 두뇌게임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주도권을 손에 쥔 루시엔은 그들을 정서적으로 흔들어 놓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하지 않는 헌터까지도 과거를 소환하여 동요를 일으키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루시엔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살인마들의 심리가 진짜인지 궁금했다면서 자신이 직접 적용해 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는 더욱 깊은 심연 속으로 헌터와 FBI를 끌고 들어갑니다. 알면 알수록 더욱 힘겨워지는 그 게임에 동참하게 되는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가 밝혀져 있는 채로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범죄자 서사를 늘어놓는 피카레스크 구성과는 달랐습니다. 루시엔과 헌터의 대화와 상황 속에서 과거는 소환되고 때로는 격자 구성을 취하면서 생생함을 더해갑니다.



챕터는 무려 100여 개가 넘어갑니다. 짧은 호흡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얕은 숨을 밭으며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프로파일러가 범인을 특정하거나 아니면 심층 심리분석을 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이 소설은 그야말로 범죄심리학자 경력이 있는 형사와 사이코패스 범죄심리학자 둘의 싸움이 됩니다.



야외로 나가서 격하게 다투는 게 아니라 취조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대결이지만 무척 생생하고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작가의 스토리텔링 실력도 상당하여 끔찍한 살인의 흔적이나 묘사가 등장함에도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보게 됩니다.



스릴러를 상당히 좋아하며 매일 이런 것만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저에게도 상당히 수위가 높았습니다. 표현력이 풍부하여 현장감 있게 다가왔기에 더욱 소름 끼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심리 묘사와 상황 묘사가 상당히 뛰어난 소설입니다.


작가 크리스 카터는 상당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시간 주립대에서 심리학과 범죄행동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형사심리팀에서 근무하며 종신형을 받은 중범죄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본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마치 송하영처럼 다수의 심리를 연구하고 분석하였습니다.



이런 경력이 지금의 소설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범죄자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하게 된 게 아닐까 합니다. 주인공인 로버트 헌터는 매력적이면서도 지나치지 않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범죄심리학자 출신의 LAPD 형사라니 제법 멋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책이 로버트 헌터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 줄 알았는데 다른 분의 글을 보니 실은 여섯 번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시리즈가 계속 출간될 예정인 걸까요?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처럼 순서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쭉 나와주길 바랍니다.


이 책은 그만한 매력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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