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리커버)
고수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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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수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아마 상상의 나래를 펴는 그 자체가 좋아서,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부하지 못했기에 나름 놀이처럼 읽어댔던 것 같습니다. 많은 책을 만나고 주니어들이나 읽음직한 글 밥 많은 소설들까지 읽으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죠.

'15소년 표류기'를 읽었던 게 7살 때의 일이니 그럴 수밖에요. 그렇지만 그 뒤로 불어닥친 - 열 살이 되기 전에도 상당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 수많은 우여곡절 때문에 더욱더 책을 통해 많은 걸 배워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건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롤 모델이 되어줄 만한 대상이 없었기에 책을 통해 남의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며 살아남았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고개를 드는 억울함과 슬픔을 약간 다크함이 섞인 시트콤처럼 만들며 살아가는 재주도 익혔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어린아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겨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면 지금은 그 역시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삶을 살아가려 애쓰고 있습니다.

글이 참 아팠다. 그렇게도 아프게 글을 쓴 이유, 가시 돋친 나를 드러냈던 이유는 '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내 모습으로 나답게 제대로 살고 싶었다.

-p. 244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저자 고수리가 '살고 싶어서' 글을 썼다면 저는 같은 이유에서 책을 읽어왔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의심되는 순간 독서를 통해서 꿈을 꾸기도 했고, 어떤 판단을 내리기 위한 기준을 알아내기도 했으니까요. 때때로 지금처럼 타인이 남긴 삶의 흔적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과거에 대한 괴로움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아니면 도로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각자 재미있는, 혹은 슬픈 스토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밋밋하거나 평범하게 산다는 거. 그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들에게도 드라마가 몇 편씩 쌓여있을 텐데 세상의 고통은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죠. 그렇다고 남의 고통을 보고서 행복을 느끼는 게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삶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게 좋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에서 작가는 늘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여준 것은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고 후회막심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스토리들이 쌓여가며 현재의 자신을 만든다는 거. 그런 걸 빠르게 깨달은 사람이라는 점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잘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하지만 나는 매일 자라고 있다. 하루, 한 달, 한 해가 지나면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자라 있을 것이다. 그때도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처럼이 아닌 고유한 나로 살아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자라 내가 되고 싶다.

-p.237

작가의 말대로 저도 자라고 있습니다. 앞으로 커서 뭐가 되는 게 좋을까 하고 미래를 꿈꾸기도 합니다. 직업적인 면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요, 이를테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고 싶다거나 마블 월드를 정복해버리겠다는 황당한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원하는 대로 몰랑이 피겨를 사 모으겠다는 포부를 가질 때도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무슨 그런 희망 사항을 적느냐고 한다면 투덜대겠지만 어린 시절 저처럼 자란 사람이 영 어덜트가 될 확률이 많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하니, 주저하지 않고 '이다음에는 사고 싶은 피겨도 세트로 사고 소고기 먹고 싶은 날에는 장바구니에 턱턱 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건 곤란할까요?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시작해 봤으면 좋겠다. 늦었다고 생각한 꿈을 다시 꺼내고 당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보길. 이름 모를 당신의 인생은 어떤 책일까. 그 첫 페이지가 궁금하다.

-p. 155

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원하는 바를 슬며시 꺼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는 참 신기한 에세이입니다. 작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쩐지 거기에 내 인생이 묻어 나옵니다. 20대 초반에 좋아했던 음악 이야기가 나오니 엉뚱하게도 - 사실은 요즘도 가끔 듣고 있는 - 劉德華의 誰人이 떠오르질 않나, 텅 빈 엄마의 냉장고 이야기를 하니 우리 엄마는 뭐 드시고 계시려나 하는 염려도 기어올라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신기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야기를 자연스레 털어놓는데도 그 장면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그려져, 나도 모르게 포장마차에 앉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잔치국수를 맛있게 호로록호로록 먹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진한 멸치 육수 향이 여기까지 따라오는 것 만 같습니다. 글 솜씨에 이런 묘한 매력이 있기에 브런치 북에서 누적 200만 뷰를 달하는 조회 수를 기록한 게 아닐까 합니다.

2019년 수오서재를 통해 책으로 만들어진 후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 최근에 리커버로 새 단장하여 나왔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새로운 표지로 만나보게 되었는데요, 부드러우면서도 텍스처가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손맛이 있어서 착 달라붙습니다.

표지 속 멀리 둥실 떠있는 구름을 보면서 내가 살던 고시원에서도 저런 한 조각 솜사탕이 있었더라면 약을 먹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살아서 드넓은 하늘에 제멋대로 떠다니는 것들을 실컷 보고 있으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면서 많은 스토리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아니 참, 그러니까 이 책이 참 이상하다는 겁니다. 분명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다시 제 이야기로 버린 걸까요? 그건 아마도 소소한 순간들을 보듬으며 진솔하게 서술했기에 친한 친구에게 그래그래 나는 이랬어하면서 이야기를 건네는 기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잠들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서로를 지켜줄 거야."

언젠가 이 밤들도 사람들도 사라질 것을 안다. 알지만 조금만 천천히, 오래, 우리가 이 밤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잠들기도 잠들지 않기도 하면서. 그렇게 서로의 곁에.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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