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면 이렇게 딱 내 스타일인지! 나를 위해서 쓴 책은 아닌지! 작가들의 센스, 그리고 상상력에 감탄에 감탄을 더하는 일만은 몇 번이고 반복을 해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펄프픽션>은 출판사인 고블의 말에 의하면 '21세기 대한민국식 펄프픽션을 정립해 보고자 기획된 앤솔로지'입니다. 표지부터 독특함이 느껴지는 이 소설집은 싸구려, 기치함을 추구한다는 설명을 들었었습니다만, 노노!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급스러움이 좔좔 흐르지는 않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느끼게 되는 묘한 쾌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펄프픽션>에는 다섯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최근 앤솔로지의 경향이 어떠한 한 장소 혹은 물건. 그것도 아니라면 특정 '단어'나 '때'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작가의 상상력을 모아놓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집은 그러한 테마가 없습니다.

이 소설들은 모두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 아니 잠깐 영국에 다녀오기도 하지만 -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라거나 고민거리를 슬그머니 끼워 넣어서 재미를 더합니다. 곳곳에 깔려있는 코드들이 때로는 실소를, 때로는 심각함을 만들어냅니다.

★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

조예은 -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읽었을 때 이미 저자의 괴이한 스토리텔링에 빠져들었습니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상 진학하지 못해 슬픈 제이와 자신의 능력 밖의 대학을 종용하는 엄마 때문에 괴로운 루루가 입시학원에서 지내며 겪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제이는 급식 직원으로, 루루는 기숙형 학원에서 남몰래 사랑을 속삭이며 괴로움을 잊지만,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더 큰 위험이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기숙 학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아니 햄버거를 먹는 순간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추측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솜씨에 꼭꼭 씹어가며 먹고 싶.. 아니 읽고 싶어집니다.

★떡볶이 세계화 본부

류연웅 - 한국의 '블랙코미디'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z세대. '카라마조프 헤븐'은 무척 충격적이었는데!

디진다 돈까스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이름이 과격하구먼, 허허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마 사람이 죽기야 하겠어...?싶었는데, 사망 떡볶이를 만드는 바람에 정말 방한한 영국 배우들을 죽게 만들어 가게도 망하고 노가다판을 전전하던 주인공이 영국의 뱀파이어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파견이 된다?!

뱀파이어가 뱀Fire가 되는 마법을 볼 수 있습니다. 웃음 코드가 남달라서 피식 웃고 나서 자존심 상하게 되는 그런 소설입니다.

★정직한 살인자

홍지운 - 오랫동안 dcdc라는 필명으로 활동. '월간영웅홍양전' 인상적이었는데! '구미베어 살인사건'은 읽었던가?

깜깜한 밤 저수지에 남편의 시체를 버리러 가서 풍덩 던졌더니 굉음과 함께 거대한 쇳덩어리가 쿠구구 나타나서 묻습니다. "선생님께서 떨어뜨린 시체는 이 금으로 된 시체입니까, 아니면 이 은으로 된 시체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도합 세구의 시체를 메고 가야 하는 걸까?

황당한 금도끼 은도끼식의 진행과 더불어서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와 마주하게 되니 마음이 이상야릇하게 촉촉해집니다.

★ 서울 지하철도 수호자들

이경희 - 이 책으로 처음 만난 작가.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을 만나고 싶다.

진상 고객을 만나면 꾹꾹 참다가 폭발하고 마는 한나에게 팀장은 10년째 최고 진상으로 맡고 있는 꼰대 이명헌을 전담한다면 앞서의 실수는 모두 눈 감겠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특근 수당까지 챙겨준다니 냉큼 일을 하겠다고 했죠. 겉보기에는 여느 꼰대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지하철이 멈춘 순간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한양에 잠들어있는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해 깔아놓았다는 복잡한 지하 철도와 노선. 한양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노인들의 노력은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 얼마나 생생하게 그려놓았는지, 저는 혹시 진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 시민R

최영희 - 청소년 책을 많이 썼습니다. 접점이 없는 관계로 펄프픽션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스타워즈의 R2D2를 꼭 닮은 청소로봇으로 자신의 주인이자 창조자를 죽인 혐의로 체포당했습니다. 스스로 귀여움을 자처하면서 늘 청결함을 유지하던 그는 스스로 공부하고 익히면서 주인의 스타일에 맞추기에 알옛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공부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수정해 나가는 거였죠.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을 시민R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어째서 주인을 죽였을까요? 천천히 그가 바뀌어 나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이미 그를 로봇 그 이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나 봅니다.


​--------------------------------------------------------------------


<펄프픽션>에는 이렇게 각기 다른 색깔과 주제의 이야기들이 놓여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21세기 한국형 '펄프픽션'의 세계라면 저는 두 팔을 들고 환영하며 이들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단 한편도 실망시키는 일 없이, 그리고 지나치게 어렵게 풀어가지 않았기에 모두 편안하게 만나며 상상의 세계로 즐겁게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