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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평점 :
턱이 아팠다.
나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감지했다.
어떤 올즈모빌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기도 전에 내 앞에 멈춰 설 것을 알았고, 차에 탄 가족의 다정한 목소리만 듣고도 우리가 폭풍우 속에서 사고를 당할 것을 알았다.
-p.20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데니스 존슨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초고속 카메라가 찍은 화면이 슬로우로 도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이 단편 소설집의 맨 앞에 실려있는 데니스 존슨의 소설 만으로도 이 책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낯선 감각이지만 그것이 눈앞에 그려져 마치 손으로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허상.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집의 스토리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단호하게 선을 긋고, 또한 어떤 것은 과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저에게만은 비밀로 하려는 듯. 손가락 하나를 입술 앞에서 세우고 미소를 짓습니다.
간질간질한 사랑을 마치 무성 영화처럼 보여주는 스토리도 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서 나는 지금 동네를 날아서 산책하는 것이라는 상상을 했던 유년기의 기억을 끄집어 내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가슴을 찢으면서도 자식을 위해서 참아내는 - 제가 보기에는 어째서 그렇게까지라는 말이 나올만한 - 스토리도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마음과 망막에 새겨지는 그런 단편들이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에 들어 있습니다.
이 책은 '문학 실험실'이라고 불리는 파리 리뷰가 주목한 단편들을 장르의 대가들이 엄선하에 뽑아낸 것으로 각각의 스토리는 어떤 테마로 엮여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특징과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읽을 수 있는 옴니버스라거나 가볍게 만날 수 있는 단편집들과는 다릅니다.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선택한 단편들로 꾸려져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때때로 난해한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에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몰라 멈칫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스토리마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해제가 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까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글을 읽으며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때로는 그것을 읽고서도 어리둥절할 때가 있습니다. 잘 못 이해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나갑니다.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몇 가지 밖에 모르는 데다가 '바벨의 도서관'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보르헤스의 소설, 그리고 읽고자 하지만 언제나 저를 고난에 빠지게 만들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까지 이 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역시 저를 흔들어 놓았고, 괴롭히고 그리고 도로 제자리에 안착 시켜주었습니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그런 책입니다.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어렵지만,
읽고 나면 가슴 복판에서 은파처럼 퍼져나가는 무언가를 느끼게 만드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