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

1974년 미국의 언론 재벌 가문의 여식이자 사교계의 꽃인 퍼트리샤 허스트가 어느 날 무장 저항 단체인 SLA에게 납치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만한 사람을 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SLA는 그녀의 부모에게 몸값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퍼트리샤가 직접 녹음한 녹음테이프만이 전달되었는데, 퍼트리샤는 다치지 않았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국제적 포로 규정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고 있음을 알리고, 몸값 대신 빈곤한 이들을 위해 기부를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간곡한 어조로, 그러나 후반에 이르러서는 부모를 거세게 비난하며 더욱 노력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불과 60여 일 후, 퍼트리샤는 자신을 납치한 SLA 대원들과 함께 은행강도 행각을 벌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체 게바라의 연인인 타니아로 개명하고 M1 소총을 든 채 스스로가 무장 대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에 그녀의 무사 생환을 응원하던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지요.

결국 납치된 지 1년 4개월 만에 FBI의 무력 진압으로 SLA 대원들이 사살되고 몇 달 뒤 퍼트리샤 허스트 역시 체포됩니다. 급하게 꾸려진 최고의 변호인단은 퍼트리샤가 무장 대원들에 의해 세뇌되어 은행강도 행위에 가담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35년 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로널드 레이건과 서부 영화로 유명한 존 웨인 등 거물급 인사들이 탄원하여 징역 7년으로 감형됩니다. 후에 지미 카터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보석금 150만 달러를 내고 가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면을 받게 되어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 사례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그녀는 작가로, 배우로 그리고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폴라 라퐁

폴라 라퐁은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합니다. 실화를 근거로 쓴 이 소설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 하지만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다소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독서력이 부족한 독자라면 시점을 맞추지 못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서를 꾸준히 해 왔던 독자라면 금세 이 이야기 <17일> 속에 빠져들어 우리가 미쳐 보지 못했던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다각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30대의 진 네베바 교수, 그리고 그녀가 채용한 10대 후반의 조수 비올렌의 시각으로 퍼트리샤 사건을 훑기 시작합니다. 퍼트리샤가 체포된 후 감금당해 세뇌되었음을 주장하며 감형 혹은 무죄 판결을 얻어내려고 하며 변호인단은 마지막으로 진 네베바 교수에게 그녀의 사건을 검토하여 무죄를 입증할 보고서를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네베바 교수는 비올렌과 함께 사건 자료를 시간순으로 읽고 들으며 놓친 것이 있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검토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되는 건 퍼트리샤 혹은 타니아의 말속에는 사람들이, 특히 부유계층의 남자들이 놓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SLA는 퍼트리샤의 녹음 메시지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내줄 것을 요구했으며 그녀의 부모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음식을 겨우 1500여 명밖에 받지 못했기에 퍼트리샤는 분노하며 다시 메시지를 보냅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어요. 하나는 안전한 장소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SLA에 합류해서 저와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거예요. 저는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누구도 식사를 제공받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모욕을 당하거나 자신의 생명과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생명을 계속해서 걱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p.163

비올렌도 저도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퍼트리샤는 과연 스톡홀름 증후군이었던 걸까요. 사면 받기 위해 거짓과 돈으로 자신을 휘감았다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진실의 목소리를 내었던 건 아닐까요.

비올렌, 우리 세대는 부모들이 미국이라는 살인 기계의 잘 기름칠 된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몹시 혼란스러워. 그들은 전쟁이 그들의 잔디밭을 피로 물들이지 않는 한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는 모범적인 노동자들이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거대한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 생각이야.

-p.149

이 소설을 따라가면서 진, 비올렌, 나라는 세 세대의 사람, 또는 여자의 눈으로 퍼트리샤를 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대가 다르다는 것은 사건을 해석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1970년대 당시와는 다른 눈으로 사건을 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 네베바 교수는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었고 비올렌은 진에 의해 깨우쳐집니다.

비올렌이 진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진 역시 비올렌에게 큰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비올렌을 통해 다시 진의 생각을 자신의 것과 합쳐봅니다. 독자인 저는 진의 눈으로, 그리고 비올렌의 눈으로 또 21세기를 사는 '나'의 눈으로 퍼트리샤를 봅니다.

책을 읽으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책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사건이라고 흘려보낼 수 있는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작가만의 스타일과 필력으로 재구성하면서 저를 이 안에 옭아매고 엮어버렸습니다. 타니아였던 시절 그녀가 냈던 목소리에 큰 감동을 받았었지만 다시 퍼트리샤로 돌아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뇌가 아닌 자유의지로, 혹시 처음부터 납치 자작극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했던 저를 실망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롤라 라퐁은 퍼트리샤가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내보였음을, 그녀가 사용했던 단어나 문장을 통해 끌어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저는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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