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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돼지의 눈
제시카 앤서니 지음, 최지원 옮김 / 청미래 / 2020년 11월
평점 :
로널드 레이건 덕후, 정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었지만 지금은 약간 주춤대고 있는 젊은 하원 의원 윌슨의 집으로 땅돼지 박제가 배달됩니다. 땅돼지를 보낸 이는 탬피코라는 예술가로, 얼마 전 그와 헤어진 유명한 게이입니다.
탬피코는 전화를 받지 않고, 무작정 땅돼지 박제를 싣고 달리던 그는 사소한 교통법규 위반으로 검문을 받다가 땅돼지 박제를 들키게 되는데, 레이시 법에 근거해서 체포당합니다.
그리고 이 윌슨의 이야기와 교차되며 등장하는 또 다른 이야기, 윌슨이 가지고 있는 땅돼지가 박제되어 영국을 떠나기까지의 사연이 진행됩니다.
빅토리아 시대, 학자인 오슬릿은 자신의 절친 다우닝에게 땅돼지를 보내고 다우닝은 정성을 다해 땅돼지를 박제로 만들지만 땅돼지의 눈만큼은 어떤 재료를 사용해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생동감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좀처럼 재료를 구하지 못하던 어느 날, 간헐적 안구 탈구증을 앓다 결국 그에게로부터 달아난 것 같은 안구 한 쌍을 오슬릿의 아내로부터 건네받습니다. 그의 젊은 아내는 한 쌍의 안구만을 남기고 마치 자신의 눈을 찾아 헤매듯, 양쪽 눈에 붕대를 하고 어슬렁거리는 오슬릿을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다우닝은 그 눈을 적절한 처리를 통해 땅돼지의 눈으로 삼고, 땅돼지는 천연의 갈색 눈 대신 푸른 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장갑 낀 손으로 겸자를 천천히 움직여 긴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내리고, 말의 이에서 추출한 액상 접착제를 바른다. 옛 연인의 눈알을 만지는, 살면서 다시없을 섬뜩하고 으스스한 순간이지만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p.102
그래요. 다우닝은 오슬릿을 사랑했습니다. 오슬릿 역시 그랬기에 아마도 다우닝에게 땅돼지를 보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우닝은 정성스레 만든 땅돼지 박제를 아주 비싼 가격에 팔아치우길 원했습니다.
다우닝을 떠난, 오슬릿의 눈을 가진 땅돼지는 시간과 공간을 떠돌다 결국 페덱스를 타고 윌슨의 집에 도달하게 된 것인데요. 윌슨은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땅돼지를 보낸 탬피코가 자택에서 자살을 했다지 뭔가요.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요. 사실 절대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동성애를 나누던 친구가 있어왔던 윌슨은 탬피코와도 그런 관계였고, 적극적으로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로부터 결별 선언과 비슷한 일을 하고서 그를 떠났던 것뿐인데, 탬피코는 자신에게 땅돼지를 보내고 자살해버렸습니다.
만약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자신의 정치생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땅돼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일로 체포당한 사실은 기자들에게 - 예상보다도 빠르게 알려졌고, 기자들은 벌떼처럼 그의 집 앞으로 달려가 진을 칩니다.
윌슨의 정적들은 땅돼지를 빌미로 맹공격을 퍼붓는데요. 기자들은 윌슨의 사치품- 중고로 사들였다 해도 본래 시세를 들먹이며 -에 중점을 두며 논점을 벗어난 보도를 시작합니다. 정적의 입김이 닿았다는 건 불 보듯 뻔합니다.
이제 오슬릿의 눈을 가진 땅돼지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세상을, 윌슨을 바라보다 또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작가는 독자가 윌슨 의원인 것처럼 '당신은'이라고 서술합니다. 이를테면 '당신은 상자를 들어보려고 한다.'처럼. 독자를 버지니아주 하원 의원으로 만들어 블랙아웃 상태의 8월의 찌는 듯한 더위에 던져놓습니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그것도 백인 남자였다면 작품 속에 더 빠져서 윌슨과 같은 난감함에 빠질 뻔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독자를 작품 속에 사로잡아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현재형이나 현재 진행형으로. 모든 현재 상황은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듯합니다.
나는 땅돼지 앞에서 어쩔 줄 모르다가 차에 싣고 달리다 경찰과도 마주치고, 애인과 함께 기자들 앞에서 약혼 선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죽어버린 이에 대한 염려, 연민, 정치생명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합니다. 무척 괴롭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보다 더 괴로울 오슬릿과 다우닝을 봅니다. 그들도 현재형으로 서술되지만, 그들의 경우 각자의 이름을 두며 진행하기에 과거의 인물이라는 인상이 또렷합니다. 그러나 윌슨과 탬피코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혹시 오슬로와 다우닝이 그들로 환생한 것은 아닌가, 세기를 거치면서 똑같은 안타까움을 가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책인가 하시겠지만, 이 책은 정치 풍자 소설입니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은 원수의 옷일까, 영웅의 옷일까?
-p.150
청미래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