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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평점 :
스기우라 시호의 코믹스 <실버 다이아몬드>에는 커다란 뱀이 나옵니다. 마음을 주어도 좋을 작은 뱀도 있었지만 보통은 엄청나게 커다래서 사람들은 뱀을 두려워합니다. 뱀에게 제물을 바치기도 합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공포의 존재였던 <실버 다이아몬드>의 뱀은 무너져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뱀들은 공포의 존재였다가 신이 되기도 하고 결국 그들 속에 스며 계속 살아갑니다.
영물로서의 뱀은 제주섬에서 민간 신앙으로 모셔지기도 했습니다. 뱀은 고양이와 더불어 식량을 축내는 쥐를 잡아주는 동물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가끔 골목길의 아스팔트 위에 짓눌린 뱀 허물을 발견하곤 합니다. 돌 문화 공원에는 뱀 주의 표지판이 있습니다.
<소원을 말해줘>의 배경 D 시에도 뱀이 많았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뱀처럼 허물을 벗는 이들은 있었습니다. 그 허물이 긁어서 부스럼이라고 할 때의 부스럼 같은 건지, 아토피를 벅벅 긁고 나면 갈색의 딱지 아래 비치는 고름 같은 건지. 어쨌든 내가 보았던 뱀의 허물들과는 다른 것 같았지만 그들은 허물을 몸이 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습니다.
인구 50만의 소도시에 어쩌면 그렇게 허물진 사람들이 많은지. 그 도시를 장악하며 상태가 심한 사람을 수용, 치료하며 연구하는 전담 제약 회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약 회사의 공 박사는 방역센터에서 그들의 허물을 치료하고 연구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사람들 중 완치된 사람은 없어 언젠가는 다시 재발하고 맙니다.
마치 허물을 벗은 뱀이 성장하기 위해 언제고 다시 허물을 벗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만 사람들에게 성장이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통받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전설의 뱀. 롱롱.
소설의 주인공 '그녀'는 파충류 사육사입니다. 뱀과 친구가 되는 법을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이 도시에서는 말이죠. '그녀'는 오래전 폐쇄된 궁에서 거대한 뱀 한 마리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뱀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녀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뱀을 섬기며 자신들의 허물을 벗겨 내주길 기원합니다. 이미 롱롱이라고 불리게 된 그 뱀은 그들에게 신이 되었습니다. 롱롱이 허물을 벗는 날, 인간들의 허물도 벗겨질 거라 믿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들은 어째서 치유되지 않는 허물을 뒤집어쓴 인간들이 되었을까요. 그 원인을 롱롱이 제거해 줄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녀'는 선지자요. 무녀일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파충류 사육사일 뿐입니다.
공포가 이념이 되고, 이념이 공포를 강화시켰다. 그 불행한 순환 속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건 허물뿐이었다.
-p.277
공포란 인간의 욕망과 여러모로 비슷하지. 공포가 공포를 낳는 것처럼 욕망이 욕망을 낳는다네.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