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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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에서 인스타그램에 뿌려둔 몇 장의 이미지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흥미가 돋았었는데, 김성희, 정명섭, 전건우, 조영주, 차무진 다섯 작가의 글이라니 더욱 끌렸습니다. 아시다시피 역사 덕후이면서 좀비 덕후인 정명섭 작가가 <달이 부서진 밤> 이후 또 하나의 좀비 괴이물을 썼다니 일단 그것만으로도 반드시 읽어야 할 각인데, 자타 공인 공포 소설가 전건우의 좀비물에 얼마 전 읽다가 배꼽 잡았던 블랙 코미디 <옆집에 킬러가 산다(어위크 수록 단편)>의 김성희, 추리 소설가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재치 있는 조영주,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아들을 데리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인 더 백>으로 주목받고 있는 차무진의 다섯 단편이 고전과 좀비의 만남을 적절히, 아주 적절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성희의 관동행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테마로 하고 있는데요. 작가의 말에 의하면 관동별곡과는 큰 상관이 없으며 다만 단점을 잘 발휘해 성공한 케이스라는 걸 포인트로 삼아 소설 속에서도 이러구러 잘 헤쳐나가는 양반으로 등장시킵니다. 광부의 카나리아 같은 정철과 김치 만병통치설에 젓가락을 꽂아도 좋을 소설이었습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관동 별곡 원본은 어떠한지 살펴보고 싶구려.

정명섭의 만복사 좀비기는 '만복사 저포기'를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김시습의 소설집 <금오신화>에 실려있는 소설인데요. 여기에서는 시귀들이 창궐하는 만복사 주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좀비 썰록의 다섯 이야기 중 가장 원작과 가까운(?) 소설이었는데요. 양생이 주사위를 던져 여인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와 분위기가 거의 같습니다. 게다가 원작에서 여인들이 읊는 시가 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시의 내용들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달이 부서진 밤>과 시기는 비슷하지만 괴이는 다릅니다. 고려 말에 정말이지 많은 일이 있었군요.

전건우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는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테마로 합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고 하면 옥희가 달걀을 좋아한다는 게 떠오르는데요. 옥희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의 아주 가느다란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지만, 전건우의 단편에서는 그 시대 핍박받던 여자, 즉 며느리이자 아내인 옥희의 어머니의 더 이상 못 참겠다. 아니 안 참겠다!!!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사랑방 손님도 됐다고 그래. 저는 비극적인 결말을 상상했습니다만, 작가의 말에 의하면 희망을 꿈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쬐끔 열린 결말입니다. (그래서 좀 무서웠어요.)

조영주의 운수 좋은 날은 동명의 소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테마로 합니다. 처음엔 당황했어요. 고전 비틀기 아니었나? 배경이 현대입니다. 채식주의자였던 해환이 -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조영주 작가는 윤해환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윤해환은 자신을 등장시켜 더욱 코믹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 남편이 떠나간 후 집안에 틀어박혀 배달음식, 그것도 치킨만을 꾸역꾸역 먹은 끝에 과거와는 다른 외모를 갖게 되었고, 재혼하는 남편 결혼식장에 쳐들어 가는데.... 그럼 운수 좋은 날은 언제 등장하는 걸까요? 알고 나면 그럴싸 한데?라고 중얼거릴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유쾌한 좀비 이야기일세.라고 메모 한 걸 후회하게 만드는 이야기

차무진의 피, 소나기가 마지막에 놓여있습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테마로 한 소설인데요. 소나기의 그 윤초시댁 손녀가 되살아나는 바람에 소년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소년은 소녀를 놓아줄 수 없었습니다. 이 단편은 무섭고 슬픈 것이, 귀엽고 슬펐던 그 이야기를 닮았습니다.

소나기에서 처음 알게 된 단어 '잔망스럽다'가 이 소설에도 있습니다. 역시 이 소설은 '잔망스러운'게 포인트였나 봅니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나 처음 본 단어가 비교적 많이 등장하지만 어찌나 적절한 곳에 두었는지 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소제목에도 붙여두었지만 좀비물을 좋아한다면 무조건 추천합니다. 하지만 액션이 넘쳐나는 헐리우드식 좀비만을 사랑하신다면 제 추천을 탐탁지 않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블랙 코미디를 좋아하시거나 전설의 고향 같은 고전 낭만을 사랑하시는 좀비 러버라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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