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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 평범하지만 특별한, 작지만 위대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임희정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0월
평점 :
말보다 침묵을, 요구보다 인내를 먼저 배웠다. 어린 나이에 어리광조차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힘겨운 부모의 삶을 일찍이 이해해버린 일은 참 슬프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 활기찼고 때때로 우울했다. 자라는 동안 아빠를 부정했고 다 자라고 나서야 인정했다. 서러운 만큼 부정하고 나니 어른이 됐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p.37
광주 MBC 아나운서 시절과 제주 MBC 아나운서 시절을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후배 양성도 하고 있는 임희정 아나운서의 고백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를 읽었습니다. 자라는 동안 막노동하는 아버지의 직업이 부끄러워 이야기하지 못하고 누군가 물어오면 쭈뼛대며 건축 쪽 일을 하고 있다고 둘러대왔지만 이제는 그 노동이 있었기에 자신의 현재가 있음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고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빠의 거칠고 뭉뚝해진 손끝과 잘 들리지 않는 귀가 자식을, 가족을 사랑한 증거입니다.
철없던 시절, 가난이 부끄럽고 아빠가 부끄러워 독립하길 꿈꾸었던 아이였지만 막상 스물여덟 살에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광주로 급히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의 먹먹함이라니. 비로소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잘 가라."
엄마의 혼잣말과 아빠의 한마디, 그 말들을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차 문을 닫고 나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나에게 독립은 이제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나에게 독립은 부모로부터 내가 나가는 것이 아닌 내 속에 있던 부모를 떼어놓는 일이었다.
-p.109
함께 있으면 부딪히기도 했지만 멀리 있으면 염려스럽고 보고픈 가족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하기도 하고, 집안에서 부업을 하기도 했던 엄마는 큰돈을 벌어오지 않더라도 집에서 아끼는 것으로 돈을 번다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알뜰하고 억척스럽지만 자식에게는 할 수 있는 한 베풀고 싶었던 엄마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허공을 바라보며 딸이 남긴 식은 밥을 찬물에 말아 김치 하나에 허기를 채웠습니다. 딸은 그런 엄마를 보며 속이 상합니다. 이제는 좀 편하게 지내도 좋으시련만.
저자는 글을 써가면서 부모를 알아갑니다. 현재의 부모님을 보며 과거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적어나갑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 부모가 왜 그랬었는지 알아갑니다. 그렇게 겨우 자식이 되어갑니다.
내가 나의 부모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써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글이 가진 힘을, 연대를, 희망을 보았다. 가장 큰 공감과 위로는 그저 뻔한 대답이 아닌 자전적 담론임을, ‘나는 그랬다’고 꺼낸 한마디가 ‘나도 그랬는데’로 돌아오는 선순환임을 잘 안다. 너무 깊어 꺼내기 힘들었지만 팔을 뻗어 어딘가에 내놓았을 때, 박수 쳐주고 독려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다.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