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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명화를 보는 눈이 없기에 다른 이의 눈과 지식을 통해 그림을 만날 수 있는 이런 책을 아주 좋아합니다. 전문인으로는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유명한 나카노 교코의 스토리텔링도 좋아하고 <법의학, 예술작품을 해부하다> 같은 문국진 교수의 법의학 접근 스토리텔링도 좋아합니다. 기자 출신 변호사 양지열의 <그림 읽는 변호사>도 좋아했죠.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영국의 유명한 작가 줄리언 반스는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풀어낼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첫 번째 세네갈 탐험대 이야기부터 이 책은 보통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필력은 무엇인가요. 이제껏 제가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니. 좌우가 크게 달라져 초점이 맞지 않는 시력에 제 체온도 못 지키는 비루한 체력임에도 그는 씩씩하게 이야기 속으로 저를 끌고 갔습니다.
그림이 나오기도 전 배경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참혹함이 저를 점점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림이 등장하자 상상보다 뗏목의 규모가 작아 놀랐지 뭔가요. 아니 겨우 저런 배를 타고 탈출하려고 했단 말이야? 그들의 비극은 예정되었던 것이로군 하며 혼자만의 생각을 늘어놓았습니다.
스토리를 가득 안고 감상하는 그림은 그 느낌이 달랐습니다. 괴리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고 잘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괴리는 줄리언 반스의 설명을 따라가다 느낀 것이 아니라 반스도 이야기한 부분이지만 화가의 표현, 그러니까 굶어죽거나 죽어가는 사람인데 너무 근육질이라는 그런 부분이었습니다.
확실히 스토리를 담고 그림을 보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이것은 나가노 교쿄의 책에서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지만, 반스의 이야기는 남달랐달까요. 평소와는 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계속 그런 패턴으로 이어지는가 하며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각 챕터마다 조금씩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적인 산책'이었죠.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작가의 이야기를 많이 할 때도 있었으며 시대적인 배경이나 사회 분위기, 미술 평론가의 흐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미술에 관해 박학다식한 이야기 잘 하는 삼촌이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니며 작품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림에 관해 이렇게 많은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홀린 듯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반스를 가리켜 “소설 형식의 혁신가”라고 했다. 반스의 소설들이 거의 대부분 혼성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 책의 에세이들도 형식 면에서 그런 특징을 갖추고 있다. 재미와 함께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지식. 여기에는 전통적인 비평적 이해에 따른 부분도 있고 사적인 것도 있다. 서양 문화의 정점에 올라 있는 저자의 ‘아주 사적인’ 감수성과 시각으로 펼쳐지는 미술 이야기와 화가의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누구든 그의 지식과 감수성에서 예상외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미술사가나 미술비평가가 아닌, 또는 그런 척하는 사람의 글이 아닌, 순수한 미술 애호가인 소설가의 사색. 미술관을 산책하며 작품과 화가에 대한 수준급 미술 에세이를 한자리에서 재미있게 두루 읽기 원한다면 이만한 책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p.404~p.405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