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가끔 영화를 만들길 잘했다고 느끼는 까닭은, 결국은 나의 허비되고 실패하고 아깝게도 다시 올 수 없는 지난날들의 힘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버려진 시간들이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선물로 받는다.
-p.106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김종관 감독은 배우 이지은의 첫 영화인 <페르소나- 밤을 걷다>를 통해 대중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더 테이블>,<최악의 하루>라는 영화를 통해 이미 그와 익숙해진 이도 있을 테지만 워낙 때리고 부수고 웃고 즐기는 영화를 좋아하는 저에겐 여전히 먼 곳에 있는 감독입니다.
<최악의 하루> 시놉시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었는지 잊었습니다. 무언가를 소개하려다가 연관되어 읽었던 것 같은데... 아니 소개하려다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저의 기억이란 이렇게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었던 것인지 겨우 몇 분 전의 일인데도 .... 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김종관의 기억은 특별한가 봅니다. 나였다면 벌써 잊어버렸을 그 기억들을 사진과 글과 자신의 내장 메모리에 두었습니다. 그의 기억은 오래 간직할 단 하나의 순간을 품음으로써 더 완벽해집니다. 그 완벽함을 나는 영상으로, 글로 만납니다.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는 시를 품은 에세이 느낌입니다. 산문인데 음악이 흐릅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선율인데 기억날 듯 말 듯 안타까운 그 기억의 한 조각이 그의 손을 빌려 형태로 남았습니다. 시야 언저리에서 스쳐 지나가듯 흘려보냈던 것들이 이 책에서는 생명을 얻고 피어납니다. 하지만 이내 목련처럼 제 기억에서 툭 떨어져 휴지처럼 사라져버릴 겁니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를 내가 본 적이 있었던가.... 그의 영화는 끝을 맺지 않는 열린 결말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습니다. 가끔 글이 열린 채로 끝나버리거든요. 그런 거 싫은데. 사진 예쁘다. 방금의 싫음은 어느새 지워버리고 예쁜 사진 속에 눈을 담습니다. 아니 눈에 사진을 담는 거였던가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의 글을 따라 그가 되어 길을 걷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걷습니다.
제주도에는 사실 올레길 외에도 수많은 길이 있고, 그 길만큼, 그 길을 지난 사람들만큼 서로 다른 추억과 사연들이 있다. 계절마다 날씨마다 다른 옷을 입고 기다리는 그 길들은 닳은 듯 닳지 않은 길이다. 그 많은 길들 중 하나인 올레길은, 길의 시작과 끝이 있지만 길을 걷는 목적은 그 끝에 있지 않다. 빨리 걸어도 좋고 천천히 걸어도 좋고, 쉬어도 좋고 뒤를 돌아봐도 좋다. 걸음이 멈추는 끝은 마을의 그루 나무이거나, 작은 포구이거나, 해 질 녘의 텅 빈 해수욕장이곤 했다. 끝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 끝에 선 기분은 마치, 보신각의 종이 울리며 새해가 되는 순간과 닮았다. 잠시 시간이 멈출 것만 같은 그 순간에도 초침은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이 무심히 움직일 뿐이니.
-p.59
그의 글은... 말하자면 가온 다를 기준으로 자신을 포함한 그 아래에서 조용히 흐르는 음악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베이스 위에서 춤추는 소프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