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귀를 너에게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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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세상엔 참 많은 프레임이 존재합니다. 자신 스스로 들어앉은 프레임도 있고, 남이 씌워 놓은 프레임도 있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데다가 그런 프레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보이는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요즘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라는 문화 심리학 책을 읽고 있는데요. 책을 읽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를 가두던 프레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재미로 생각했던 일들이 당사자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나의 상처는 남들을 의식한 프레임이었다는 사실 같은걸, 유럽인의 시선으로 본 동양인에 대한 글을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마루야마 마사키의 <용의 귀를 너에게>에도 많은 프레임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듣지 못하는 사람,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오해와 고정관념이 제일 크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작인 <데프 보이스>를 읽으면서도 잔잔한 아픔과 마음의 울림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들리는 자들 가운데 살아가는 듣지 못하는 자의 괴로움만큼이나, 듣지 못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만이 들을 수 있었던 아라이는 외로웠습니다. 듣지 못하는 것이 혹시 유전이 될까 봐 아이를 갖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을 안고 있는 그는, <데프 보이스>에서 경찰서 사무직을 그만두고 구직활동을 하다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수화 통역사로 일합니다. 그리고 법정 통역도 하게 됩니다. <용의 귀를 너에게>를 읽기 위해 <데프 보이스>를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래야 전작에 등장했던 주요 등장인물들과 주인공 아라이와의 관계, 그리고 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읽지 않았더라도 이 책을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용의 귀를 너에게>에서도 아라이는 수화 통역사로서, 그리고 법적 문제가 생긴 농인의 수화 통역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강도 용의를 쓰고 법정에 선 농인의 통역을 하기도 하고, 같은 처지의 청각 장애인에게 사기를 친 범인의 취조 통역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분노했습니다. 검사나 형사의 태도가 못마땅했습니다. 듣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고정관념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과연 비장애인에게도 저렇게 대했을까 싶은데요. 특히 형사의 태도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순한 아라이까지 발끈했을 정도였습니다.

또 하나 화가 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정육학(正育學)이라는 건데요. "누구나 아이를 낳는 순간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바르게 길러 냈을 때 비로소 부모가 됩니다."(p.138)라는 말로, 언뜻 보면 무개념 부모가 많은 요즘 세상에 참 괜찮은 말이구나 싶은데,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저 말을 주장하는 가지 히데히코의 뜻은, '발달장애도 부모의 애정에 따라 예방, 개선할 수 있다.'(p.139)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다시 말하자면 발달장애나 행동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애정을 주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올바른 자식 교육을 표방하는 것 같지만, 실은 양쪽 부모 모두가 충분한 애정을 줄 수 있는 가정의, 이른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만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 개념은 소설에서 굵직한 토대가 되어 자주 등장합니다. 유력 정치인이 추진하는 법안에도 나타나는데요. 진짜 정말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게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상상하는 '정상적인' 가족에서 태어나기란 금수저로 태어나기보다 더 어려운 일 아닐까요? 이런 정육학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슬퍼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저 역시 그중 하나고요.

주인공인 아라이는 청각장애인인 부모님과 형과 함께 살던 들리는 아이, CODA로 자라왔지만, 제대로 마음이 따뜻한 어른이 되었고 연인 미유키와 동거하며 그녀의 딸 미와에게도 좋은 아빠(아직은 아란찌로 불리지만)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육학이라는 말은 그에게 상처가 됩니다. 또 한 명, 미와의 동급생 에이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미혼모의 아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아직 어리지만, 마음의 병으로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하지 않는 함묵증에 걸려있습니다. 아라이에게 수화를 배우고 소리를 내지 않아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음을 조금씩 배우던 에이치는 얼마 전 자신이 목격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과연 에이치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있을까요.

용이 사용하지 않는 귀가 퇴화하여 바다에 떨어져 해마가 되었고, 용의 귀는 농(聾)이 되었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 아이 에이치는 용의 귀를 받아 세상과 만났습니다. 손으로 하는 대화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 뻔한 아이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지켜냅니다.

책에서는 청각 장애인에 대한 편견뿐만 아니라 미혼모, 발달장애, 행동장애 같은 -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 프레임을 다룹니다. 슬프다가 화가 났다가, 그리고 다시 잔잔해집니다. 전작 <데프 보이스>는 장애인에게 그리고 비장애인에게 추천하고 싶었는데요. 이번의 소설 <용의 귀를 너에게>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모두 함께 읽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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