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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평점 :
표지에 속았습니다.
책을 처음 만났을 때엔 로맨틱 코미디물인 줄 알았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서른셋까지 혼자였던 한 여자가 나중엔 둘이 되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좌충우돌 발랄한 이야기. 하지만 아니에요. 비슷하긴 한데 아니에요.
오영오. 난 너라는 문제집을 서른세 해째 풀고 있어. 넌 정말 개떡 같은 책이야.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어. 삶의 길목마다, 일상의 고비마다, 지뢰처럼 포진한 질문이 당장 답하라며 날 다그쳐.
-p.40
주인공인 오영오는 외롭습니다. 학생용 교재를 출판하는 출판사에 다니며 휴가도 휴일도 제대로 챙겨 본 적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전쟁인데, 집으로 돌아가면 보일러마저 고장 난 차가운 바닥이 그녀를 반길 뿐입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 떨어져 살면서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던 중, 더 오래전, 폐암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사용하던 압력 밥솥과 그 안에 들어있는 수첩을 발견합니다. 수첩에는 자신의 이름과 세 명의 모르는 이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과연 이 이름의 의미는 뭘까요?
한편, 고등학교 진학을 거부하는 통에 엄마로부터 쫓겨난 미지는 아빠와 함께 엄마가 재개발을 기대하며 남겨두었던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고, 옆집에서 넘어온 고양이 덕분에 옆집 할아버지와 인연을 트게 됩니다.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인연이 점점 커져만 갑니다. 이사 오기 전엔 오직 오쌤, 오영오만이 대화 상대였는데요.
엄마가 폐암으로 돌아가시자 실금이 가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나버렸던 영오는 내내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아버지의 흡연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며 비난했습니다. 넉넉지도 않았던 살림,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외로움으로 내던졌습니다. 죽을 때까지 외로웠던 아버지가 내내 염려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버지의 수첩에 적힌 사람들이 누굴까 궁금했지만, 굳이 찾아봐야 하나 생각하던 차, 명단의 맨 위에 있는 남자, 홍강주가 연락을 해옵니다. 아버지가 경비로 일했던 중학교의 기간제 교사인 강주를 만나고 그의 부추김으로 다음 사람인 문옥봉을 찾습니다.
상처 없는 사람 없어. 여기 다치고, 저기 파이고, 죽을 때까지 죄다 흉터야. 같은 데 다쳤다고 한 곡절에 한마음이냐, 그건 또 아닌지만서도 같은 자리 아파본 사람끼리는 아 하면 아 하지 어 하진 않아. -p.171
영오는 명단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금껏 몰랐던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 채워갑니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 그 대신 사람들이 있다. 나의 0.5, 내 절반의 사람들이. -p.273
물론 미지도 자신의 영역을 찾습니다. 옆집 할아버지와의 인연도 그렇고요. 부모 자식 간의 일에 오지랖을 피우며 연결해주려 애쓰는 모습이 저는 좀 짜증 나기도 했습니다만 - 그런 영역을 남이 함부로 터치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모르고 하는 소리. 라는 게 이럴 때 쓰는 겁니다. - 서로가 화해하고픈 마음은 있었지만 용기가 없던 차였기에 이럴 땐 오지랖도 필요한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쨌든, 이 책은 표지처럼 산뜻하고 발랄하기만 한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죽음 후에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도, 내 주변인이 죽은 후의 일도, 나의 외로움도, 남겨질 이의 외로움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1입니다. 하지만 제가 사라지면 빈자리를 채워주던 사람은 어쩌면 좋나요. 그래도 어떻게든 빈자리를 채울 겁니다. 분명히.
마지막 챕터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에잇. 괜히 마음이 뭉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