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도 웃던 날들 - 차가운 세상에서 뜨겁게 웃을 수 있었던
정창주 지음 / 부크럼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누구나 흑역사는 가지고 있는 법이죠. 저 역시 흑역사를 갱신하며 살아가고 있는데요. 너무 부끄러워서 기억에서 삭제시켰다가 우연한 계기로 생각나는 바람에 발버둥 치기도 합니다. 이불 킥. 중고등학생 때의 기억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 때의 흑역사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째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건지. 20대 때의 모든 시간이 흑역사였을지도 몰라요. 부끄러우니까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정말 나는 파렴치했구나 싶을 때도 있고, 그 정도는 귀여운 거 아닌가 할 때도 있는데, 내가 만일 정신 차리고 열심히 잘 살았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기승전 우리 아이이므로,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현재 흑화 상태인 우리 딸을 못 만나면 안 되므로 과거가 어쨌건 간에 나는 과거의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요. 찌질하거나 허황된 꿈이 있었던 과거는 부끄럽습니다. 이걸 다 내놓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기에 정창주 에세이 <분노도 웃던 날들>을 읽으며 오만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 사람 용감한 거야, 무모한 거야? 아니 이게 뭐지? 이제까지 이런 글은 없었다. 이것은 에세이인가, 흑역사인가.

난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기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굉장히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다.

-p.26

흐흐흐... 나돈데. 졸업하고 나면 평범한 삶이 아닌 뭔가 대단한 삶을 살 것 같았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굉장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뭔가 특이하긴 하지만 정상궤도에서 이탈해버린 나는 지금 이 지경이..... 아, 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고, 책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데.

저자 정창주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들을 했을 겁니다. 어떤 곳에 취직해서 어떻게 살고.... 그런데 현실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서 예상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곤하죠. 저자는 이다음에 어떻게 잘 나가려고 했었는지, 대학 때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지금 내 입장에서는 별로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다 승리 꼴 날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지 않은 게 다행히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에세이는 현재의 직장인인 '내'가 과거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의 '나'를 회상하며 진행됩니다. 전북 익산에서 상경하여 대학에 진학, 망상에 가까운 대학 생활을 하면서 점점 현실을 깨달아가는데요. 우와. 누가 이 책 좀 읽어주세요. 남자들은 좀 그런가요? 특히 현재 30대 초반의 남자분이 읽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는데요. 대학교 1학년의 남학생의 머릿속은 저런 건지, 저자가 특이한 건지. 만약 대부분이 그렇다면, 전 너무 순진했던 거죠. 아니, 제 친구들도 저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요. 세대가 달라 그런 건지, 성별이 달라 그런 건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 다른 건지. 저분만, 아니면 나만 그랬던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대학생인 저자는 무척 삐딱했습니다. 뭐랄까... 대학 다니는 양아치 느낌? 허세로움과 상스러움이 콘셉트인가 봅니다. 왜 그런 게 멋져 보이는 시절이 있잖아요. 그랬던 거라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허세가 아직도 다 안 빠졌어요. 쓸데없는 비유와 글에서 느껴지는 허세,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만 알아들어라 하는 식의 거친 문체가 현재의 모습에도 실려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비포장도로를 달려가는 펜대이므로, 금고아를 금강저라고 하는 실수도 하는 거죠. - 손오공의 머리에 있는 건 금고아, 수라왕 슈라토가 들고 있는 건 금강저입니다.

어쨌든 과거의 저자보다 지금의 저자는 철이 좀 들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는.. 아, 이렇게 말해도 되나 몰라요. 에이 몰라. 발정 난 멍멍이 같았어요. 책 읽다가 몇 번이나 돌아가 책날개의 저자 사진을 보았습니다. 음....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이젠 그냥 떠올릴 수도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난 적어도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응큼하게 아닌 척하지 않는다. (그냥 대놓고 응큼하게 행동한다) 싫다는 여자에게 추근덕대지 않는다. 아들딸 아내 애인 두고 가라오케에 가거나 윤락행위를 하지 않는다. 없어 보이게 사랑과 섹스를 돈으로 삯 치려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마음껏 놀지 못한 것에 대한 때늦은 분풀이. 난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제까지 봐 온 늦바람 든 어른들은 솔직히 멋이 없었다. 생김새를 떠나서 그냥 멋이 없었다.

-p184

이 부분에서, 어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이었잖아? 했습니다. 1학기 초반만 해도 아 미안합니다. 이 X 끼 뭐야. 했거든요. 이 거친 문체와 속 울렁거리는 - 이거 뭐지 나도 막 비속어가 나오려고 해 - 내용에, 망했다. 이 책 어떻게 끝까지 읽지... 그래도 출판사와의 의리로 읽어내고 말겠어!!! 하며 멘탈을 붙잡고 읽었는데, 읽다 보니 적응이 되더라구요. 희한하네....

아무튼 저자가 대단합니다.

자신의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이렇게 거칠게 써 내려갈 수 있다니.

덧) 이 에세이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즐겁게 - 과거를 회상하며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같다고요....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제가 남자가 아니라서 막연히 그렇지 않을까 짐작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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