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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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만날 때마다 나는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하이네켄 납치 사건이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하이네켄의 회장이 납치된 사건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보통 큰 사건이 아니라 영화로도 제작되었었더군요. 영화에서는 평범했던 다섯 명의 청년이 하이네켄 회장을 납치하고 결국 실패하는 모양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별점 리뷰들로 미루어보아 참 어설프고 순진한 청년들로 그려졌던 것 같은데요.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범들 중 하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웠던 사람이었거든요. 그가 <나의 살인자에게> 책 표지에서 동생의 목말을 태워주고 있는 소년입니다.

<나의 살인자에게>의 저자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는 하이네켄 회장 납치 사건의 주범 빌럼 홀레이더르의 막냇동생입니다. 어릴 적부터 상당한 폭력에 노출되었던 4남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공포와 싸웠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심각한 가정폭력범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고, 맨정신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그야말로 가정의 모든 것들이 자기 발아래 복종해야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큰 피해자는 어머니였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남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남편에게서 해방되었지만 그녀의 고통이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그 공포는 큰 아들 빌럼, 빔에 의해 다시 시작되고 말았으니까요.

폭력에 장시간 노출되었던 아이들은 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딸들은 잘못된 배우자를 만났으며 아들은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작은 아들이자 아스트리드의 작은 오빠인 헤라르트는 책에 많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포의 영역 밖으로 탈출한 것 같습니다만, 그 외의 다른 가족들은 계속하여 고통받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침내 변호사가 된 저자, 아스트리드는 오빠의 범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하이네켄 납치 사건이 자신의 발목을 잡습니다. 간신히 떨치고 일어나 변호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으나 결국엔 오빠 빔의 법률 자문 비슷한 것이 되고 맙니다. 강하게 거부하면 좋지 않았는가 하는 조언은 필요 없습니다. 빔은 자신의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제거하는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가족이어도, 동업자여도, 동료여도 말이죠. 하이네켄 납치 사건의 동료이자 동생 소냐의 남편인 코르를 제거하는 것도 그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동생들은 오빠 빔이 코르를 청부하여 죽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십여 년간 자신들이 알고 있는 걸 오빠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녀들은 지켜야 할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빔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아이들을 볼모로 협박하곤 했습니다. 결국 아스트리드는 큰 용기를 냅니다. 오빠가 교묘히 피해 갔던 것들에 대한 증언을 함으로써 그를 영원토록 감옥에 가두어두어 공포에서 탈출하려 합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 완전 신뢰란 없지만 그래도 대체로 신뢰하는 - 오빠를 통해 대화를 녹취하고 증언대에 섭니다. 결국 감옥에 들어간 빔. 그러나 그녀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동생을 죽이라고 청부 살인자를 보내는 빔. 그를 피해 숨어살아야만 하는 아스트리드. 마치 자신이 감옥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빌럼이 애초부터 사이코패스 경향을 나타냈던 건 아닙니다. 정말 필요할 때엔 동생을 지킬 줄 아는 소년이었고, 십 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보통의 소년이었거든요. 아버지가 경찰 시험을 보러 가려던 빌럼의 눈에 멍을 만들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빌럼은 경찰관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들과 까칠하긴 하지만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돈 때문에 하이네켄 회장 납치라는 어설픈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자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폭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란 한 남자가 온 가족을, 자신을 아는 사람들을, 자신을 모르는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그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위험은 깊어지고 공포에 갇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가장 큰 피해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공포 때문에 아들에게 굴복하면서도 나머지 자식과 손주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아스트리드는 어렸을 때 오빠와의 기억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빠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세상에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책을 쓴 것도, TV 쇼에 나오는 것도 얼마나 엄청난 짓인지,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이토록 조마조마한 수기라니.

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안쓰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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