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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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꼭 제 아이의 나이였을 때, 학생에게는 흔하지 않은 아이템인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좋아하는 음악 카세트테이프를 가지고 다니며 들었어요. 이어폰 줄을 교복 상의 왼쪽 팔 부분으로 빼내어 손목을 거쳐 손바닥에 팜 하여 머리를 받치고 공부하는 척 듣기도 했고요, 머리가 길었을 때는 목뒤로 줄을 빼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머리카락을 숨기기도 했죠. 강제로 하는 자율(?) 학습 시간에 조용한 교실에 테이프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옆 친구의 귀띔에 라디오를 듣기로 했어요. 가끔 선생님의 감시가 소홀할 때면 친구랑 같이 듣기도 했는데요. 사연은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웃기는 사연에 빵 터지는 바람에 푸확하고 웃었지 뭐예요. 마침 복도를 지나시던 선생님께 딱 걸려서 그 귀한 플레이어를 압수당했고, 선생님께서는 학년 끝날 때 돌려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날 자율학습이 끝날 때까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요.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도 못 했던 거 있죠? 제가 잘못한 거니 사정해서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사죄는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엄연한 규칙 위반이었으니까요. 교무실로 찾아갔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다음부터는 자율학습 시간에 듣지 말라며 플레이어를 돌려주셨습니다. 이럴 수가. 기대도 안 했는데. 고맙습니다. 그 뒤로는 라디오를 안 들었냐고요? 그럴 리가요. 혼자서 조용히, 웃을 일이 없는 잔잔한 방송만 들었죠. 아주 조용히 말이에요. 학생 때 보통 그렇잖아요? 안 걸리면 되는 거지 뭐.라고요.




집에 돌아와서도 음악을 들으며 공부했어요. 집에서는 좀 큰 투 데크라고 하나요? 그런 플레이어로요. 집에서 음악을 줄기차게 듣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 독차지해도 상관없었어요. 나중에 알았죠. 남동생도 음악을 좋아한다는걸요. 라디오라고 하면 청취자로서의 그런 사연도 있지만, 저... 제주 지역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한 적도 있어요. 중학생 때였는데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피아노를 치고 친구와 함께 노래하고, 디제이와 이야기도 나누고요. 아버지 친구분이 라디오 들었다며 큰소리로 칭찬하고 소문내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들켜서 호되게 혼이 나기도 했죠. 그러고 보니 라디오 때문에 혼난 게 한두 번이 아니로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라디오를 참 좋아했어요. 음악도 좋고 사연도 좋고요.




지금에야 SNS나 유튜브 같은 방송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내가 모르는 세상과 내가 아는 세상의 경계가 희미하지만, 잡지 뒤에 해외 펜팔 주소가 존재하던 그 시절엔 라디오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책과 만화책으로 가득 차, 책상 하나와 내 몸 뉠 공간밖에 없던 내 방안이 음악과 디제이의 목소리로 가득 차는 그 기분, 창문을 열면 저 멀리 수평선이 밤 어선들로 반짝이고 조용한 바람이 소나무를 지나 내게 도착할 때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라디오는 저에게 그런 마법을 선물해줬어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어요.




세월이 흘러 지금은 두시 탈출 컬투쇼 같은 웃기고 신나는 방송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어요. 잔잔한 밤의 방송은 저를 더 가라앉히더라고요. 때로는 힐링, 때로는 킬링. 그걸 견디기엔 너무 얇은 유리 심장이 되어버렸지 뭐예요. 음악과 사연이 함께하는 라디오 방송은 시간과 시대,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나 봐요.

그런데도 꾸준히 사랑받은 코너가 있대요. CBS 방송의 <꿈과 음악 사이에>라는 코너인데요. 그 방송을 통해 12년간 꾸준히 사랑받은 진행자 허윤희의 에세이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을 읽었어요. 매일 밤 10시. 청취자의 사연과 함께하는 음악 방송인데요. 북트레일러를 통해 허윤희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적절한 호흡과 매끄러움을 느끼고 나니 어째서 그 긴 시간 동안 청취자가 밤마다 그녀와 함께 하길 원했는지 알겠더군요. 참 좋았어요.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청취자의 사연을 12년간 잘 들어 주던 그녀가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어요.

처음엔 청취자 사연을 갈무리한 책일 거라 생각했었는데요, 청취자와 함께 커가는, 함께 듣는 자신의 성장과 일상, 그리고 명상이더군요. 붕 뜬 기분으로는 읽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으려고 했더니만, 어느새 넋 놓고 방송만 듣고 있는 거 있죠? 하는 수없이 집에 있는 mp3 파일을 끌어모아 곰 오디오에 걸어놓고 책을 읽었어요. 청취자의 사연을 읽을 때면 소리 내어 조용히 읽어보기도 했고요. 잠깐 눈을 감고 허윤희가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여보기도 했습니다.

순간 팍 닿아서 위로가 되는 문장들이 있더라고요.



조용한 밤에, 음악을 걸어놓고 읽어보세요. 분명 마음을 두들기는 이야기를 만나실 거예요.

서로 다른 부분일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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