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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 - 핵사이다 <삼우실> 인생 호신술
김효은 지음, 강인경 그림 / 청림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분당에 있는 회사에 다녔드랬습니다. 아홉시 출근, 여섯시 퇴근에다가 주 5일 근무제가 없었던 때라 토요일도 종일 근무였죠. 그러다가 사장님께서 이젠 우리 사무실도 슬슬 토요일은 반일 근무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완전 반일은 무리지만, 월요일마다 있는 행사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토요일에는 점심을 일찍 먹고 두시까지만 일하는 걸로 하자고 하시더군요. 회사 시스템상 매주 수요일은 보통 아홉시가 넘어서 퇴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나마도 전임자는 일이 자꾸만 밀려서 밤 12시 넘어서 퇴근하기 일쑤였다고 하더군요. 전임자에게 길들여진 판매 사원 및 팀장님들께서 마감 협조를 안 해주셔서 저에게도 그러려고 하시더군요. 입사 초기에 이러다간 계속 끌려다니겠다 싶어서 매몰차게 커트를 하고 여덟시에 마감, 아홉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보고 독하다며 뒤에서 흉을 보더군요. 왜죠? 여섯시에 퇴근하는 게 원칙인데 아홉시까지 기다려줬는데.
여섯시 퇴근이 원칙이라고는 하지만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희한하게 다섯시 삼십 분만 되면 갑자기 새로운 일을 시켜요. 토요일 반일 근무는 무슨. 두시에 새로운 일을 시키는 바람에 네시나 네시 삼십분에 퇴근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근무 외 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월화 연속으로 여섯시 반에 퇴근하고, 수요일은 아홉시, 그리고 목요일에 또 여섯시 반에 퇴근하려는데 사장님이 부르시더군요. 요새 왜 그렇게 일찍 퇴근하냐며 정색하시던데요. 그래서 말했죠.
저는 입사할 때 여섯시 퇴근이라고 들었습니다, 근무시간에 모든 일을 다 해놓았고 지금은 퇴근시간을 삼십분이나 넘긴 여섯시 반인데 일찍 퇴근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씀인데, 토요일에 두시까지 근무하는 걸로 하자고 하시고선 왜 네시 넘어 다섯시까지 퇴근을 못하게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토요일에도 정시 퇴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요. 사장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함께 근무하는 언니는 좋아하시군요. 덕분에 일찍 - 일찍이 아니죠.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요. 전 그때 미혼이었지만, 언니는 아이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퇴근시간을 넘겨서 퇴근하는데도 눈치를 봐야 하는 직장생활은 이십 세기에 끝났어야 하는데, 이십일 세기인 지금도 여전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요.
여자라고, 막내라고, 지방 출신이라고 등등 갖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가며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속 시원하게 말을 하자니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고, 계약직이면 재계약 안될 것 같고, 인사고과에 반영될 것 같고...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걸 무기인 양 휘두르는 사람들. 더 나쁜 건 자기들이 하는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 소위 꼰대들 -에겐 어쩌면 좋을까요? 누가 속 시원하게 사이다 한 병 들이부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삼우실이라는 아이디로 연재를 하는 툰이 있더군요. 직장 내에서 참 말도 안 되는 소소하거나 소소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조용히'라는 사원이 시원하게 대응을 해요. 꼰대에게 당하면 반드시 갚아주는 성격이거든요. 매번 시원하게 갚아주는 건 아니고요. 네 컷 만화 아래에 글로 표현하기도 해요. 그래도 도시락을 싸온 여자 직원에게 자기 것도 싸다 달라며 난처한 부탁인지 명령인지를 하는 선배에겐 고수를 잔뜩 올린 즉석밥을 건네준다거나, 과일은 여자가 깎아야 한다는 말에 울퉁불퉁 엉망으로 깎은 사과를 내밀었을 땐 - 사진이 있더라구요 - 빵 터졌어요. 정말 이렇게 내주면 어떤 반응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저도 과일은 정말 못 깎거든요. 우리 집엔 과도가 아예 없어요. 역시 과일은 껍질째 먹는 거 아니겠어요?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은 삼우실의 웹툰과 글을 모아 편집하여 낸 책인데요. 이 책을 읽다 보니 참 사무실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구나... 내가 본 건 일부일 뿐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러면서 어떻게 회사를 다니는 걸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당한 누군가가 또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방법으로 황당한 짓을 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중간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손경이 성교육 강사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었는데요. '가해자가 없으면 피해자도 없다.'라는 글이 참 와닿더라고요. 이런 상사나 선배 때문에 어이없어 하고 힘들어하고선 자신도 어디선가 참신한 행동을 한다면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책은 사무실에서의 일을 보여주고 있지만, 공간을 확대해서 생각하면 어느 곳에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에요. 어쩌면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겠죠.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예민을 떤다거나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저지른다거나 하면서요.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은 재미있게 읽고서 자아 성찰도 할 수 있는 책이었는데요. 현재 사무실에서 열심히 근무하는 회사원이라면 자신의 회사에서도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기분이 나빴다가 좋아졌다가 할 수 있을 거예요. 아아, 정말로 대놓고 조용히 사원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아니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