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큰 부모가 아이를 크게 키운다
이원숙 지음 / 동아일보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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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국제음악제에 다녀온 후 정트리오에 대한 책을 읽고 싶었는데 정트리오에 대한 책이라곤 정명훈을 주인공으로 한 음악동화와 정명훈이 낸 요리책(; 그나마 절판) 외에는 정트리오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가 쓴 이 책 뿐이어서 사실 육아에는 아직 큰 관심이 없음에도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할머니(지금은 돌아가셨지만)는 그냥 사람이 아닌 것 같다. ; 그 시절에 7남매를 억척같이 키워낸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일인데, 아이들 한명한명마다 각자의 재능을 찾아주어서 3남매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나머지 4남매도 버젓한 사회인으로 키워내다니. 그 밑천은 스스로 장사해서 번 돈으로 모두 마련한 것이라니. 입이 떡 벌어지는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몇 가지는 최근에 방영된 승승장구 정명화 정경화 편에도 소개가 되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극성 엄마라고 할 수 있겠는데, 강남의 극성 엄마들과는 극성의 유형이 너무 달라서 그 말을 붙이기가 좀 그렇다. 일단은 아이가 7명이나 되었고 생업도 직접 꾸려야 했기 때문에 여타의 극성 부모처럼 늘 아이들 옆에 꼭 붙어 있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자신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그 아이의 옆에 꼭 있고자 노력했다고. 양보단 질로 승부한 셈. 전업맘에 대한 열등감에 늘 시달리는 직장맘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 듯. 늘 교육비와 생활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돈의 소중함을 알고 경제적인 독립심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 정명훈도 어린 시절부터 시애틀에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용돈을 벌었고, 정명화와 정경화가 줄리어드를 다니던 시절에도 방학이 되면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 와서 서빙과 계산을 도왔다. 요즘 극성 부모들 같았으면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데 무슨 아르바이트냐며 만류했을 일.

아이들을 키우면서 세 가지만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첫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둘째는 아이들의 실수를 야단치지 않는 것. 셋째는 약간 신선한데, 칭찬거리가 아닌 것을 함부로 칭찬하지 않는 것. 정경화, 정명훈의 경우 워낙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에다가 안 그래도 완벽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다가 대고 실수를 지적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미칠 것이기에 실수를 절대 야단치지 않고, 지금 실수를 했으니 더 큰 무대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테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격려를 했다고. 그치만 아무 근거 없는 추상적인 칭찬은 아이를 오만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오히려 열등감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에 칭찬거리가 있을 때 칭찬을 했다고. 그냥 "똑똑하다", "예쁘다"가 아니라, "한번 들은 노래를 그렇게 잘 따라 부르니 참 똑똑하다."든가, "머리를 그렇게 묶으니 참 예쁘다."는 식으로. 그렇게 해야 아이가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정트리오에 대해 알게 된 몇 가지.

* 정명화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첼로를 잡기 시작했다. 음악적인 기초가 탄탄했기 때문에 그때 첼로를 잡고도 대성할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재능이 반드시 5, 6세 때 발견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줌.

* 정명훈은 줄리어드 음대에서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지원을 제안받고도 줄리어드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학교인 매너스 스쿨을 택했고, 그곳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함께 전공하면서 촉망받는 학생으로 인정받아 자신감을 키우게 된다. 보통의 부모라면 줄리어드 이름값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당연히 줄리어드를 권유했을텐데, 자식의 특성과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면 지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결정.

* 정경화와 핑커스 주커만은 갈라미안이라는 같은 선생 밑에서 배우던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함께 레벤트리트 콩쿠르에 나가 공동우승을 했다. 사실 연주는 정경화가 훨씬 잘 했지만, 핑커스 주커만과 같은 유대인인 아이작 스턴이 공동우승을 고집하여 콩쿠르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우승을 줬다(물론 이것은 이원숙 여사의 버전이므로 객관성이 완전히 담보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 정명훈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2등을 했을 때 정부에서는 카 퍼레이드를 해 준다. ;;; 외국에 나가 콩쿨에서 수상을 하는 것과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동일하게 대한민국의 존재를 해외에 증명하는 일로 인식되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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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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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선생님의 새 책이 나왔다. 작년에 빈에 관한 여행 서적을 읽고 또 유럽에 가게 된다면 빈에만 1주일 동안 머무리라 다짐했었는데 그 꿈을 실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장소에 대한 책이 나와버리다니. 물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게 될 가능성은 빈에 갈 가능성보다는 훨씬 희박하긴 하겠지만.. 

 

탱고 춤에 관해서는 입문서가 있는 거 같은데, 탱고 음악에 대해서는 국내에 이렇다 할 책이 없는 가운데 알아주는 음악 안내자인 박종호 선생님이 이런 책을 낸 것이 몹시 반가웠다. 뭐 평소에 탱고 음악을 아주 즐겨듣는 편은 아니긴 한데, 언젠가 우연히 접해서 사게 된 피아졸라의 앨범을 직장 초년생 때 혼자 야근하거나 주말에 일을 하면서 자주 틀어놓았었던지라 피아졸라를 들으면 그때 기억에 젖게 된다. 옆방에서 역시나 야근을 하시던 부장님이 퇴근 전에 인사를 건네러 잠시 우리 방에 왔다가, "피아졸라를 좋아해요?"라고 물으셨던 기억이 가장 생생한데, 자타공인 클래식 애호가인 부장님께 음악과 관련한 관심을 받았다는 감격스러움? 뭐 그런 (부장님에 대한 나의 선망을 알지 못한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감정도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생애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1년이 아니었던가 싶다. 긴 어둠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내가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의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부장님, 동료들과 한 배를 타고 있다는 느낌, 부장님에게 일을 열심히, 진지하게 한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느낌, 업무가 너무나 흥미로워서 평생 일만 하고 살아도 아무 불만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그 이후의 4년 동안에는 부분적으로는 존재했지만 총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때의 1년이 더더욱 아련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 위에 피아졸라의 애잔한 선율이 얹혀지는 것이다.

 

각설하고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면, 이 책은 탱고에 대한 책이기도 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탱고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박종호 선생님은 탱고 음악에 대해 쓰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2주 동안 체류하면서 다양한 탱고 클럽에 가서 탱고 춤과 음악을 감상한다. 말벡 포도주를 곁들여 아르헨티나산 스테이크를 썰면서 탱고를 혼자 감상하는 여행이라... 거의 혼자 놀기의 지존급이 아닌가 ;;; 클럽에서의 탱고 감상의 추억을 하나씩 공유하는 가운데, 탱고 춤과 음악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진다. 유럽에서 일자리를 찾아 아르헨티나의 부두 지역으로 이주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내려 사내들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탱고의 기원이라고 한다. 당시 함께 이주해 온 여자들 숫자가 워낙 적다 보니, 남자들끼리 외로움을 울부짖으며 춤을 추게 되었던 거다. 춤을 추려고 하니 당연히 음악이 필요하다. 이렇게 탱고 음악은 춤으로부터 시작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탱고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면서 독자성을 갖추게 된다. 주로는 남자가 여자한테 실연당하는 내용인데, 역시나 여자들이 너무 적은 까닭이다.

 

탱고 음악이 체계화되면서 탱고 반주를 위한 악기도 발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중심 악기로 자리잡은 것이 바로 반도네온이다. 반도네온이 아르헨티나 고유의 악기가 아니라, 독일에서 들여온 악기라는 것도 흥미로운 점 중 하나다. 반도네온이 만들어내는 그 애잔하게 심금을 울리는 소리는 왠지 독일의 정서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ㅎㅎ 본래는 탱고 연주 앙상블이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로 주로 구성되었었는데, 반도네온이 폭풍 인기를 끌게 되면서 반도네온이 플루트를 밀어내고, 나중에는 피아노가 기타의 자리에 주로 들어왔다. 거기에 콘트라베이스가 추가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탱고가 아르헨티나에서 자리잡아 가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류층 문화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는데, 탱고를 고급 문화에 끼워주지 않고 유럽 문화만 선호하는 아르헨티나의 상류층들의 뒷통수를 칠 만한 일이 발생한다. 20세기 초에 우연히 파리에서 탱고 음반이 발매되었는데, 갑자기 그 음반이 큰 인기를 끌면서 파리의 엘리트와 상류층 중심으로 탱고가 유행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다시 그 분위기가 아르헨티나로 다시 유입되고, 결국 탱고가 국민 음악으로서의 자리를 잡게 된다. 비유가 천박하지만 SM의 음악은 음악도 아니라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유럽 여학생들이 동방신기와 샤이니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고 한류 음악의 위상에 슬그머니 놀라는 형국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탱고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 가면서 작곡가와 작사가가 함께 탱고 음악과 가사를 만드는 경향이 나타나고, 탱고의 가사가 단순한 실연의 노래에서 이별의 아픔과 환멸을 좀더 섬세하게 표현하는 시적 노래로 발전하게 된다. 그 이후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탱고 가사의 주제가 변천하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한창 아르헨티나가 근대화되던 1900년~1920년까지는 도시화로 인한 각종 부작용들이 나타나면서 주로 어린 시절이나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게 되었고,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가 미친데다가 쿠데타까지 일어났던 1930년대에는 사회와 인간 전반에 대한 절망과 비탄을 노래하게 된다. 1940년대에는 탱고 가사가 문학의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고 평가되기도 했다는데, 이 당시 탱고 가사를 쓴 사람 중에에서는 - 비록 그 개수가 많지는 않지만 - 보르헤스의 이름이 단연 눈에 띈다.

 

탱고의 인기는 1950년대에 거의 정점에 달했지만, 헐리우드 문화가 유입되고, 룸바, 맘보, 차차차, 로큰롤 같은 외국 댄스 음악들이 들어오면서 탱고의 인기는 급격히 식었고, 탱고 무용수와 클럽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탱고 음악가들은 일자리를 잃으면서 고난의 세월을 겪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 자체로서만 살아남아야 헀기에, 춤을 수반하지 않는 연주 자체의 발전과 세련화에는 좀더 기여한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런 과정에서 나타난 최고의 탱고 음악가가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이다. 피아졸라는 반도네온 연주자로서 18살 때부터 밑바닥에서부터 탱고 음악을 경험하면서 탱고를 작곡하게 되었고, 클래식의 구조를 탱고에 도입하기 위해 유럽으로의 유학을 감행한다. 사실 유학을 가서는 나디아 불랑제라는 유명 음악교사에게 클래식을 배우면서 마음먹은대로 잘 되지 않아 위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느날 혼자 탱고를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던 피아졸라에게 나디아 불랑제가 "지금 연주한 것이 당신의 진정한 음악이야. 그것을 그만두지 마. 지금까지 당신이 나에게 보여 주었던 클래식들은 유럽 문화에 대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어."라고 말을 한 후, 피아졸라는 더이상 클래식을 답습하려고 하기보다는 탱고라는 자신의 음악적 원천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클래식과 결합시켜 아디오스 노니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 리베르탱고 같은 감상용 탱고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역시나 탱고가 처음에 상류층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처럼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 곡들도 아르헨티나에서는 잘 안착하지 못했는데, 또다시 유럽에서 탱고 열풍을 일으키면서 아르헨티나로 역수입되었고, 반도네온을 연주하던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아르헨티나 최고의 오페라극장인 콜론 극장에서의 공연을 마침내 한다.

 

이후 탱고 곡들은 저명한 클래식 연주자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는데, 그 연주자들 중에서는 역시나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낳은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빼 놓을 수 없다. 비록 바렌보임은 9살 때 이미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긴 하지만, 45년이 지나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방문해서 반도네온 연주자 로돌포 메데로프와 만나 의기투합해서 예정에도 없이 탱고 바를 방문하고,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불려나온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엑토르 콘솔레와 즉흥 탱고 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 탱고 바에 있던 손님들은 얼마나 횡재한 기분이었을까. 그런 즉흥 연주의 추억으로부터 나온 음반이 바로 아래 음반이다. 마침 집에 있길래 지난주 내내 이 책을 보면서 함께 음반을 들었는데, 아.. 정말정말 좋았다. 이 음반의 첫 곡은 내 사랑 부에노스 아이레스(Mi Buenos Aires querido)인데, 바렌보임이 치는 이 곡의 메인 선율을 듣고 있자면 오랜만에 고향땅에 돌아와 길을 걸으며 담벼락 한자락한자락을 손끝으로 만지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초로의 신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너무 과장스럽다고 욕하시지 말고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  

 

                       

 

듣는 김에 바렌보임이 탱고 연주하는 모습도 보고 싶어서 유튜브 검색을 하다가 대박 영상을 발견했는데, 2006. 12. 31.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바렌보임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나선 Tango Argentina 실황 연주이다. 이 책에도 추천 DVD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클래식을 듣기 시작하면서 새삼 유튜브가 보물창고인 걸 느낀다. 이 콘서트가 열린 장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7월 9일 거리', 왕복 24차선에 폭이 144미터인 세계에서 폭이 가장 넓은 도로 한복판에 있는 오벨리스크 앞에 설치된 야외 무대인데, 연주회가 시작될 때에는 밝은 저녁이지만 뒤로 갈수록 어둠이 드리우면서 건물 위의 네온사인이 조명 역할을 해 주는 가운데서 연주회가 진행된다. 그 장소도 멋지거니와, 카메라가 무대와 도로에 자리잡은 관객들을 번갈아가면서 비추는데, 관객들의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들 또한 보는 사람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지게 만든다. 어떤 관객들은 음악에 맞춰서 빈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탱고를 추기도.. ㅋ 연주회는 거의 클래식 탱고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는데, 반도네온 없이 오케스트라 연주만 하기도 하고, 반도네온 연주자인 레오폴도 페데리코가 이끄는 반도네온 팀인 티피카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하고, 바렌보임이 혼자 피아노로 막 연주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오케스트라 지휘하기도 하고, 탱고 가수가 나와 노래도 부르고, 춤 추기도 하고, 유명한 탱고 작곡가인 오라시오 살간이 자기 곡 연주하기 전에 나와서 막 인사도 하고.. 암튼 다채롭고 감동적이며, 연주 또한 훌륭하다. 음악에 너무 빠져서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지휘를 하다가 한곡 끝나면 씨익 웃는 바렌보임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또한 무척 반갑다. 바렌보임이 스페인말로 뭐라뭐라 중간에 계속 얘기하는 걸 알아들을 수 없어서 좀 유감스럽긴 하지만.. (Dvd도 있는 걸 공짜로 보는 게 어디냐) 암튼 위 음반과 영상만큼은 시간 날 때 한번 봐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다. ㅋㅋ

 

                     

쓰다 보니까 굉장히 길어졌는데, 탱고에 대해선 이 정도로 얘기하면 충분할 거 같고, 사실 이 책에는 탱고랑은 크게 상관없는 아르헨티나와 관련된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에비타 페론, 체 게바라, 파블로 네루다, 디에고 마라도나 등등. 뭐 다른 부분들이야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는데 마라도나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축구 얘기는 좀 이질적이었다. ㅋ 24시간 비행기타고 아르헨티나 가서 축구경기 관람했는데 아무데도 그 경험에 대한 글을 못 쓰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라는 마음이었다고 이해해 두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여러 관광 명소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콜론 오페라 극장도 아니고, 에비타 페론의 묘지도 아닌, 산타 페 거리에 있는 '아테네오 서점'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구조가 특이한데, 과거의 오페라 하우스를 서점으로 개조한 건물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무대는 레스토랑 겸 까페가 되었고, 1층의 객석과 2, 3층의 발코니는 서가가 되었고, 박스석은 사람들이 앉아서 쉬면서 책을 읽는 곳이 되었다. 천장에는 오페라 하우스 시절부터 있던 천장화가 그대로 남겨져 있다. 만에 하나 내 생의 어느 순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게 될 기회가 있다면 다른 곳을 제쳐두고 여기부터 가 보게 될 것 같다. ^^ 별 만점을 주고 싶었지만, 출판사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박종호 선생님이 여기에서만 책을 내시는 건 좀 아쉽다) 별 하나를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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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맨 빅보이스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악가, 개정판
토마스 크바스토프 지음, 김민수 옮김 / 일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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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ARD 콩쿠르 일등을 한 뒤 동정어린 시선이 나를 따라다닌다. 이것은 배낭에 든 맷돌과도 같은 느낌이다. 콩쿠르 당시 세 번째 예심에서 탈락한 어떤 친구가 "네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거야!"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날 그 친구는 이름모를 무대에서, 나는 카네기홀에서 노래하고 있다. 나는 그 친구의 불행을 조금은 이해한다. 음악 비즈니스세계는 험하고 치열하다. 성악가들도 일정 수준에 이르기 위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한다. 그 수준에 이르면 예술가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정받지 못하면 매우 고통스럽다.

장애인 프리미엄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누명은 잊은 지 오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까. 장애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나라는 인간의 일부이다. 관객들이 무대 위의 나를 인식하는데 영향을 준다. 좋은 친구인 소프라노 줄리안느 반제는 나의 장애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토마스의 모습은 그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집중케 해 준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대 위에서 멋진 프록코트도 입지 못하며, 내 몸뚱이는 작고 보잘 것 없다. 뭔가 인상적인 제스처를 해야 할 때면 내게는 강렬함이 부족하다. 무대 조명 아래 보이는 것이라고는 땀에 젖은 내 얼굴뿐이며, 노래 부를 때 벌리는 커다란 입뿐이다. 하지만 성악가에게는 외모가 아니라 노래가 중요하다. 노틀담의 꼽추같이 생긴 성악가는 한 시즌 정도 호기심을 끌 수 있다. 진정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성악가의 예술성이다.

 

최근에 DG(도이체 그라모폰) 111 한정판에 들어 있는 CD들을 한장씩 꺼내서 들어보고 있는데, 들을 만한 CD를 찾던 중 토마스 크바스토프(Thomas Quasthoff)라는 성악가가 눈에 들어왔다. 앨범 자켓만으로는 별다른 특이점을 느끼지 못한 채 네이버에 혹시 참조할 만한 자료가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이 사람이 키가 130cm에 불과한 탈리도마이드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탈리도마이드는 1950년대에 독일 임산부들이 입덧 방지용으로 먹던 약인데 그 부작용으로 아기가 자궁 속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해 팔과 다리가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게 된다. 손가락 발가락도 온전히 다섯개가 나지 못한다.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DG랑 전속계약까지 맺은 승승장구하는 음악가라니. 무언가 궁금증이 일어서, 몇년 전에 절판되어버린 이 책을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어렵게 찾아내서 수중에 넣었다. 다 읽고 나서는 크바스토프 본인보다는 크바스토프의 부모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본인의 천부적인 자질과 의지력만으로는 장애인이 아무런 꿈을 펼칠 수 없는 시대였다(불행히 오늘날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누가 됐더라도 삶을 포기하고 자신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크바스토프의 부모는 아들이 희망을 갖고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눈물겹게 노력한다. 의사는 크바스토프가 걸을 수 없다고 단정했지만 부모는 의족으로 걷기와 의족을 벗고 침대에 눕기를 수없이 함께 반복한 끝에 크바스토프를 걷게 했다. 그 어느 학교에서도 장애아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해서 가게 된 특수학교는 정신이 말짱한 탈리도마이드 장애 아동들과 정신분열증 장애 아동들을 한 반에 두고 수업을 하는 곳이었기에, 부모는 끊임없이 전학의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진보적인 교장이 취임한 일반학교에 크바스토프를 보내 비장애인과 동일한 내용의 수업을 듣도록 한다. 또한 성악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14세 때부터 본격적인 성악 교육을 받도록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노래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돌려보내는 수모를 겪은 것도 한두번이 아닐 터다. 부모는 크바스토프를 하노버대학 음대에 보내고 싶었는데, 음대에서는 성악 전공이라도 악기 1개는 다룰 수 있어야 입학을 허가할 수 있다고 하면서 크바스토프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부모는 크바스토프를 하노버대학 법대에 보낸다...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법대는 늘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 그 이후에 다행히 유수의 콩쿨에 입상해서 유명세를 떨치고, 미국에서도 데뷔를 하고, DG와 전속계약을 맺고, 사이먼 래틀의 은근하고 끈질긴 부추김으로 끝까지 꺼려했던 오페라 무대에서도 온전히 역할 하나를 맡아서 수행하고, 음악 대학의 교수가 되고 하는 승승장구하는 과정들, 그 중간의 어느 지점 - 카네기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쯤이었을까? - 에 부모는 아마도 이제는 이 아이를 세상에 두고 먼저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거고, 어머니는 약을 잘못 복용한 죄책감에서 조금은 벗어났겠지.. 아들의 중후한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눈을 감고 지나간 날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했을 크바스토프의 부모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책을 읽으면서 DG 111의 CD를 같이 들었는데 그 CD들보다는 아무래도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유튜브에서 듣는 편이 좀더 친숙했다. 땅을 뚫는 저음도 인상적이지만, 한음한음 정확하게 발음되는 독일어가 귀에 꽂힌다. (곡 사이사이의 관객들의 폭풍 기침도 ;;) 최근에 타계한 피셔디스카우의 것도 들어봤지만 난 크바스토프의 폭풍저음이 좀더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언젠가 한번쯤은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올해 초에 건강이 안 좋아서 은퇴를 했다고 한다.. 안타깝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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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 방탕아인가, 은둔의 황태자인가? 김정남 육성 고백
고미 요우지 지음, 이용택 옮김 / 중앙M&B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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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의 북한 전문 기자인 저자가 우연히 베이징 공항에서 김정남과 조우하고 명함을 건넨 것을 계기로 김정남과 이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면서 교환했던 이메일 전문과 마카오에서 직접 만나서 한 인터뷰를 묶어서 낸 책이다(국내에 번역되기 전에 조선일보에서 이 책에 김정남이 천안함이 북한 소행임을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대박 오보를 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515547.html). 호기심에 읽기는 했는데 다 읽고 나서는 굳이 다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었던가 회의가 들었다. 물론 다수의 독자들이 말씀하시는대로 나도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좀 다를 수 있는 인물이겠다는 결론을 얻기는 했다.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을 분들을 위해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정도만 정리해 둔다.

 

* 김정남은 김정은과 정식으로 만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한다(김정일 사망 전에 한 얘기이므로 김정일 장례식장에서 만났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이복형제라지만 그래도 로열 패밀리의 일원인데 그럴 수 있는지.. ;;

 

* 김정남은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사회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김정일도 원래는 아들을 후계자로 삼지 않겠다고 공언하여 왔다고 하던데, 갑작스럽게 최근 몇년 내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운 것에는 아마도 어쩔 수 없는 내부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또 동생에게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감추지는 않았다.

 

* 김정남은 북한이 살기 위해서는 중국과 같은 개혁, 개방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거듭해서 주장한다. 실제로 저자가 파악하기로는, 스위스 유학 후 귀국해서 자본주의적인 제도들을 북한에 도입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김정일의 노여움을 산 것이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주요 원인이었다고 한다(지나치게 방탕하다는 등의 이유가 아니라).

 

* 김정남은 저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김정은에 대하여 후계자가 된 이상, 선군정치와 같은 정치이념보다는 북한 주민들의 윤택한 생활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것이 북한과 김정은을 꽤나 자극한 모양인지 위 인터뷰 기사가 나간 이후부터는 김정남은 극도로 말을 아끼고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동생에 대해 꽤나 실망감을 느꼈는지, 김정일 사망 직전에 주고받은 이메일에는 "정은이를 북한 주민에게는 물론 대내외로 홍보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외모가 고 김일성 주석을 닮은 것만으로 홍보가 될까 싶네요. 유감스럽게도 그 어린애의 표정에선 북한같이 복잡한 국가의 후계자가 된 사명감이나 신중함, 향후 국가 비전을 고민하는 그 어떤 생각도 읽을 수가 없어요."라는 정도의 쎈 표현까지 쓴다. 이런 대목들 때문에 출판된 후에 꽤나 곤욕을 치루지 않았을까 싶었다.

 

* 김정남은 계속해서 자신은 북한의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이라면서 의도적으로 북한 정세와 거리를 두고 있다. 스스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당연히 대외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입장일텐데, 속으로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중국이 김정은 체제가 위기에 봉착할 경우 대안으로 중국에 친화적이고 개혁, 개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김정남을 옹립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김정남에 대해 철통 경호를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는 것이다. 뭐.. 얼마나 실현 가능성 있는 얘기인지는 알 수 없다.  

 

* 김정남이 보기에 국내 출간 서적 중 '만화 김정은'은 사실에 가까운 책이고, 중앙일보 기자가 썼다는 '후계자 김정은'은 소설에 가까운 책이란다.

 

* 김정남은 대한민국을 (북한 사람들과는 달리) '남한'이라 부르고, 그가 평소에 쓰는 말투도 북한말보다는 남한말에 가깝다고 한다. 이화여대까지 졸업한 후 월북한 어머니 성혜림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고, 오랜 외국 생활을 하면서 북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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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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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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